[차종관칼럼] 위협받는 관조(觀照)의 삶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회에는 세 가지 삶이 있다고 말했다. ‘지식과 생산의 삶’, ‘즐기는 삶’, 그리고 ‘관조의 삶’이다. 세 가지 삶을 추구하는 동안 그 끝은 ‘에우다이모니아’, 즉 ‘최고로 번성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 상태를 그는 ‘행복’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 문화에서 세 번째 삶인 관조적 삶이 매일 위협받고 있다. 관조가 위협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진정한 행복의 질과 상태가 위협받고 있다는 뜻이다. 관조적 삶은 행복이 무엇인지 계산하는 방식으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관조(觀照)의 사전적 의미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달리 이상주의적 인생관이 아닌, 실재론에 근거한 인생관을 가르쳤다. 진리가 현실 세계에 있다는 그의 실재론은 다른 말로 실체론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세상을 구성하는 질료와 형상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게 상응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고유한 형상을 자기 안에서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추구했고, 그것을 진정한 자아실현이라고 가르쳤다.
그의 인생관은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기 위한 지식적 기반을 요구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므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그 욕망을 끊어내거나 절제할 때 행복한 삶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욕망을 끊어낼 힘이 이성이며, 이성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교육을 통해 중용의 덕을 갖출 때 비로소 이성적 인간으로서 충분한 형성을 보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은 참된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므로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관조적 삶은 자율적인 정신의 삶을 함양하는 행위이므로 내일을 예측할 힘을 갖추게 한다. 물론 이것은 미래를 예측하는 어떤 초인간적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관조적 삶을 훈련할 때 인지적 능력이 향상되고 통찰력과 성찰을 뒷받침하는 자기 확장적이고 포괄적인 과정이 향상되며 삶의 질이 증진된다. 인지신경과학과 문학, 그리고 발달 심리학적 관점으로 볼 때 이것은 옳다. 물론, 종교적 가르침에도 이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성서에도 생각하라, 들으라, 그리고 행동하라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무분별한 디지털 읽기 문화가 관조적 삶을 방해하는 주범이다. 디지털 읽기의 가장 심각한 폐해는 우리 뇌의 회로를 바꿔놓는 것이다. 읽기 회로에서 조기에 발달하는 인지적 구성요소가 디지털 매체에 의하여 바뀌는 것은 그 사람의 주의, 기억, 배경 지식의 발달, 속도, 주의 분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디지털 읽기는 깊이 읽기를 구성하는 비판적 사고, 개인적 성찰, 상상, 공감 같은 보다 느린 인지 과정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런 문화가 아이들에게 ‘tl; dr’ 즉 "너무 길어서 읽지 못했어요(too long; didn’t read)."라는 자조적인 푸념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 과학 문명을 떠나거나 포기한 채 살아갈 수 없다. 오히려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과학적 부산물은 우리에게 선물이 된다. 하지만, 이런 문명을 문화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우리의 뇌와 가슴은 점점 더 깊이 읽고 생각하는 인간 본연의 성질을 잃어가게 한다는 경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헤르만 헤세가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것처럼 객관적이고 이차적이며, 나아가 미학적 인식의 범위를 넓혀가는 학습과 관조, 사고와 창작을 도모하는 일상을 실천하는 것도 디지털 읽기 같은 관조를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짧은 글, 긴 생각"을 화두(話頭)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짧지만, 평생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일상이 쌓여 일생이 되지 않나. 짧은 영상을 이어 붙인 게 영화 아닌가. 일상을 낯설게 보는 재미를 되찾는 일이 곧 관조적 삶의 시작이다. 아직 바람이 차지만,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는 길가의 개나리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아, 봄은 오고야 마는구나." 젊은 남녀 청춘들의 가벼워진 옷차림을 한 번쯤 힐끗 쳐다보며 기분 좋게 지나치는 것도 모두 관조적 행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행복한 삶이 관조적 삶이라고 말했다. 이제 잃어가고 있는 이런 엉뚱하지만 비범한 관찰력을 되찾아보자!
차종관 세움교회 담임 목사, 전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