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수칼럼] 가능한 한 느리게
연주시간이 639년 소요하는 음악을 상상할 수 있을까. 연주의 끝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 작품 ‘Organ² / ASLSP’(1985)는 ‘가능한 한 느리게’라는 부제가 있어 연주방식에 따라 악곡의 길이가 다르다. 악보가 겨우 8면에 불과한 이 음악은 케이지오르간프로젝트의 이름으로 아주 긴 연주여행을 하고 있다.
독일 중부 할버슈타트의 부르카디교회에 특수 제작된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2001년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오르간은 작품 초입의 ‘여백’을 연주하느라 17개월 동안 침묵했다. 2003년에야 비로소 첫 화음을 울렸고, 2024년 2월 5일 열여섯 번째 파이프 변경 작업을 했다. 전자식 풍력기계장치로 작동하는 이 오르간은 악보에 따라 파이프를 가감하고 모래주머니가 건반을 눌러 소리를 유지한다.
오늘날 키보드의 12음 스키마(schema)는 1361년 봉헌된 할버슈타트 대성당 오르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00년도 기준에서 역산한 과거시간 639년만큼을 미래에 설정했다. 천 년 전에 세운 부르카디교회는 세속화되어 헛간과 창고로 사용되다가 새 과업으로 생명을 얻어 파이프의 깊은 울림을 품어주고 있다. 46년째 우주 밖으로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호의 이미지가 겹치며 시공(時空)의 장구함을 새삼 깨닫는다.
느림과 기다림을 선호하지 않는 우리에게 이 프로젝트는 수용이 다소 버겁다. 시간을 단축하고 공간의 제약을 줄인 초고속 사회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다. 속도가 늘 우위의 가치를 가질까. 적응과 속도의 효율은 가상현실시대를 사는 데 유리한 조건일 수 있지만 인간의 행복감을 본질적으로 높여주지는 않는다.
유럽인들은 ‘7일 이내’, 동남아시아인들은 ‘3일 이내’, 한국인은 ‘당일 배송’이라고 대답한 ‘빠른 택배’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가 있다. 정부의 교육정책은 정권에 따라 급변하기도 하고, 정치는 변동의 진폭이 커서 불안정하다. 국내 공연기획 일정은 유럽에 비해 기간이 꽤 짧은 편이다. 시간 사용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를 방증하는 사례들이다. 미래 예측이 분명하지 않으면 불안이 조성되며, ‘조급함’으로는 합리적인 ‘정교함’을 대신 할 수도 없다.
작곡자의 지시어 "가능한 한"을 해석하는 기준이 누구에게나 동일할 수는 없다. 인내심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다룰 일도 아니다. 다만 불확실한 시간에 담긴 영속성을 체험하며 그 의미를 찾아낸 이들의 내면이 흥미롭다. 프로젝트 참가자들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 공연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사실에 고무된 것 같다.
비현실적이었던 작품은 혁신의 예술프로젝트가 되었고, ‘할버슈타트케이지콘서트’는 세계인들을 매료시켰다. 케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지적 호기심으로 영원성을 통찰하게 한다. 부질없는 욕망을 내려놓고 장엄한 시공 앞에서 겸손하기를 당부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우리의 편협한 인내심에 가늠이 모호한 세월을 들이대며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말을 건다. 콩알만 한 푸른 점에 달라붙어 단지 한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슬로우가 실현 가능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공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1997년 트로싱겐 오르간심포지엄에서 제기되었다. 오르간연주자와 제작자, 음악학자, 신학자, 철학자들은 타이틀과 퍼포먼스에 적합한 연주기술과 미학적, 철학적 관점을 숙고했다. 그들은 미래 세대에도 평화와 창의성이 존재하는 한, 이 작품은 "느림"을 생각하며 연주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2640년 9월 4일 토요일 폐막식 입장권을 예매하세요. 당신이 그 날짜에 갈 수 없으면 양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자손을 초대하세요"라고 본 프로젝트재단 홈페이지에 쓰여 있다. 아무도 그날의 실행을 담보할 수는 없지만 퍽 낭만적이다. 우리는 어떻게 후손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먼 조상이 남긴 예술프로젝트 폐막식에 간 미래의 후손은 천장지구한 핏줄의 뜨거움을 느끼지 않을까. 만약 내 할아버지가 600년 전에 남겨준 입장권을 오늘 사용한다면 나는 가슴이 먹먹할 것 같다. 미지의 자손을 위해 ‘2640‘ 폐막콘서트’ 티켓 2장쯤 남겨두고 떠나면 어떨까.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창의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