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웅칼럼] 대한민국 초대 총리
‘우등불, 그 불길을 바라보며 때로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고, 그리운 조국을 생각했다. 우등불 앞에서 불꽃 사이로 어른거리는 회상. 쓰러져간 전우들을 생각했다. 우리의 자유를 꿈처럼 그려보기도 했다. 조국의 앞날을 환상으로 엮어도 보았다.’
이글은 이범석(李範奭 1900-1972)장군의 자서전 ‘우등불(모닥불)’의 한 부분입니다. 우등불은 이범석 장군이 30여 년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군을 이끌고 다니면서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추위 속에서 야영할 때 우등불을 피우고 군인들끼리 몸을 덥히던 생명 같은 불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장군의 아버지는 강원도 이천(伊川)군수, 양양군수를 지냈고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친어머니 이상의 사랑으로 보살핀 계모 밑에 자랐습니다.
1907년 집안의 머슴 출신 정태규(丁太圭)가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체결로 군대해산에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이범석은 항일 투쟁할 것을 결심합니다.
1915년 이범석은 여운형(1886-1947)을 만나 중국으로 가서 1916년 항저우체육학교를 거쳐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이때 구대장 서가기(徐家驥)가 자기이름의 기(驥)자를 따서 호를 철기(鐵驥 쇠처럼 강한 천리마)라고 지어주었습니다.
1919년에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쟁 때 제 2제대 지휘관으로 공을 세웠고 1923년에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1925년 이후 소련 합동 민족군 지휘관으로, 중국 항일군 흑룡강성군 작전과장, 낙양군관학교 한적군관대장, 중국군 제 3집단군 55군 군단참모처장 등을 지냈습니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 제2지대장으로 1945년에는 광복군 참모장(중장)으로 독립을 위해 오직 군으로 온몸을 바쳤습니다. 그에게는 장군 외에 딴 호칭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부인은 김마리아(1903-1970)여사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25년 이범석 장군과 결혼했는데 김상옥 열사와 함께 마상(馬上) 쌍권총 실력이 뛰어나 별명이 쌍권총 김마리아였다고 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러시아 톰스크(Tomsk)에 있는 수용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1940년 광복군에 입대하여 이범석 장군을 보좌했으며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러시아어 교관과 광복군 대원들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만주에서 고려혁명군에 입대하여 정치 공작대원으로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교전에 참전했으며 그 후 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 그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게 되어 고생을 하였습니다.
이범석 장군은 해방되고 1946년 6월에 귀국하여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민족지상(民族至上), 국가지상(國家至上)의 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하여 단장에 취임하였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을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국방장관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말을 타고 동네 순시를 나선 일본 순사를 향해 고무줄 새총을 쏘아 순사를 말에서 떨어지게 하기도 하고 뱀을 잡아다가 소의 항문에 뱀을 집어넣어 소를 죽게 만드는 등 온갖 짖궂은 장난을 하여 화가 난 아버지가 도끼를 던졌는데, 이를 말리던 계모가 도끼에 무릎을 맞아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계모 김씨는 인자하고 한문에도 능통하였고 교양이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부수립의 초대 국무총리 초대 국방장관의 직책 수행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짐작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는 그가 작사, 작곡한 기전사가(祈戰死歌 전쟁에서 죽기를 기원하며) 후렴가사 '맹세코 싸우고 또 싸우리니 / 성결한 전사(戰死)를 하게 하소서'처럼 광복된 조국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국정에 임하며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땀을 흘렸다고 생각해 봅니다.
총리나 장관보다 이범석 장군이란 호칭이 더 자연스러운 영원한 장군, 그는 독립운동가요, 애국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오직 국민, 오직 국가 외엔 딴 생각을 하지 않았던 지도자들이 우리 역사에 별처럼 빛이 납니다.
유화웅 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