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수칼럼] 다하지 않고 남기는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겨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겨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겨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겨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 김정희 선생이 쓴 편액 ‘유재(留齋)’의 풀이 글은 ‘다 쓰지 않는’ 절제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선거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뿐 전쟁과 다를 것이 없다. 권력을 위임하는 일이다 보니 관여하는 이들은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운동경기의 관중은 구경꾼이지만 선거전에서는 선수와 관중이 합세하여 경기를 치른다. 심지어 부모 형제간에서조차 심각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몰입이 경계를 넘어 사적 원한도 없는 정치인을 테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피의자의 신념과 자아가 과도하게 동기화되어 자기 현실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제22대 총선에서 정당 공천 일부 예비 후보자들이 문제의 발언과 행위로 인해 사퇴하거나 교체되었다. 논란이 된 과거의 흔적은 자신에게 무거운 책임으로 돌아왔고 여론의 거친 비난을 받았다. 사안이 진영에 따라 ‘안타까움’과 ‘문제없음’으로 달리 받아들여지자, 옳고 그름의 분별은 사라지고 전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선거전에서는 여론의 이성적인 반응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논란의 내용에는 듣기에 거북한 것과 사실에 부합한 것이 혼재되어 있었다. 시비가 합당한 기준에 근거해서 가려지는 게 아니라 여론의 백병전으로 확대되었다. 예민한 표심 앞에서 정당들은 문제를 서둘러 봉합했지만, 합리적인 장치와 규준을 마련하기 위한 숙고가 필요해졌다.
첫째,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내용의 옳고 그름을 구분할 기준과 범위가 설정되어야 한다. 사회 정의에 맞고 논리의 비약을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규범이나 관습에 따르기보다 헌법 전문이나 역사적 사실에 근간을 두고 법규를 제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 누가 그들을 평가할 것인가. 유권자는 투표일 이전에 그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다. 언론이 유권자 대의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런 신뢰를 받지 못한다. 언론이 특정 세력을 견지하는 규범만 따른다면 더는 유권자의 권리를 대신할 수 없다. 의견을 내기보다 사실을 왜곡 없이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공정한 언론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논란의 빌미를 준 당사자는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절제 없이 쏟아놓은 과거 흔적들은 족쇄로 작용한다. 말과 글이 빠르게 퍼지는 미디어 시대에 조심성은 자신의 몫이다. 경솔한 말실수로 인해 개인 능력을 사용할 기회가 사라진다면 이 사회를 위해서도 손실이다. 부작용이 따른다 해도 선거는 민주주의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다. 선거 과정에서 모욕적인 언사와 욕설만 없애도 ‘다 하지 않고 남기는’ 아름다운 축제가 될 것이다.
최근 의·정 갈등을 풀어가는 과정이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불안정하다. 대화 방식도 합리적이지 않고 여백 없는 치킨게임 같다. 아직 ‘덜 채운’ 여유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양자가 자기 방식의 협상 조건을 고집하니 고통과 불안은 국민의 몫으로 남는다. 공공재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진 사회시스템을 가질 수 없다.
1826년 암행어사로 충청도에 간 완당 선생은 부조리한 현감을 파직했다. 그 일에 반감을 품은 자들에게 훗날 모함을 받은 선생은 조민영의 도움으로 구명하여 8년 넘게 제주도 유배 생활을 했다. 젊은 시절 연경에서 금석문 감식법과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서체, 한(漢)·위(魏) 예서체를 섭렵했던 선생은 그 배움 위에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시·서·화·전각으로 예원을 풍미했다. 세상과의 격리는 예술가에게 좋은 창작 환경이었다.
완당은 노쇠한 후기 조선 사회에 자신의 예술로 공헌했다. 선생은 정치에서 상처받고 모든 게 부질없음을 깨닫지 않았을까. 두 차례의 유배로 10여 년을 보낸 선생은 ‘내려놓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유재’로 남겨 놓은 것 같다. 이념도 욕망도 꽉 채운 것은 위험하다.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룬 선생에게 ‘덜 채우는’ 지혜를 구하면 어떠한가.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창의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