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수칼럼] 세미한 음성으로

2024-05-19     주용수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이 복수심에 차 인간성을 상실해 간다. 옳고 그름의 판단력은 점점 소실되어 가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생명에 대한 번민이 가득하다. 번즈 중사와 엘라이어스 하사는 전쟁과 인간에 대한 태도에서 반목과 갈등을 거듭한다. 증오를 품은 번즈는 혼란한 전투 중에 엘라이어스를 향해 은밀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미처 탑승하지 못한 엘라이어스가 적에게 쫓기는 모습을 탈출하는 헬기에서 대원들이 내려다본다. 그가 총탄을 맞으며 쓰러지는 장면에 새뮤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따라 나온다.

영화 ‘플래툰’(1986)에서 올리버 스톤 감독은 바버의 음악을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바버가 현악사중주 No.1 제2악장(1936)으로 쓴 이 곡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일작품으로 확대되었고, 합창, 피아노, 관악기를 위한 버전으로도 변환되어 무대에 종종 오른다. 비극적 음향 이미지를 가진 이 곡은 루스벨트, 케네디, 아인슈타인, 그레이스 켈리, 9.11 희생자의 장례 추모곡으로도 사용되었다. 아다지오란 ‘느리게, 주의 깊게’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모든 음에 신중한 의미를 담아 표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음악의 특징은 섬세하게 구성된 절제미다. 설득력이란 음량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악구는 차분하게 곡 전체를 관통한다. 선율은 간결하지만 복합적인 화성이 단조로움을 상쇄한다. 고요하게 전개되는 음향은 청중이 감정을 붙들고 천천히 몰입하도록 깊게 울린다. 이 곡은 조용한 제시부에서 강렬한 발전부를 지나 평온한 재현부로 나가는 전형적인 아치 구조를 가졌다. 처연한 스트링앙상블 사운드는 마치 전쟁의 부질없음을 웅변하는 듯이 서로 얽히며 서사를 확장한다.

‘인생 수업’에서 E.퀴블러 로스는 상실의 아픔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으면 슬픔과 분노를 넘어 극심한 죄책감, 우울감과 정신적 해체 상태에까지 도달한다. 너무 슬픈 일을 당하면 감각이 무뎌지고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잊기 위한 어떤 노력도 유효하지 않으며, 아픔을 품고 바닥까지 내려간 후에야 다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최근 비극적인 사건들의 사후 처리 방식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가족들은 희생된 가족과의 급작스러운 단절에 당황했다. 참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가 어느새 비인간적이고 이념화 되어버렸다. 사회는 가장 진실한 방식으로 그들의 작별을 도와야 한다.

세계언론자유의 날에 ‘국경 없는 기자회(RSF)’는 ‘2024년 세계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한국을 180개 대상국 중 62위로 발표했다. 언론자유 국가분류 절대평가에서는 ‘양호’에서 ‘문제’로 내려앉았다. 북유럽 국가들이 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시아 국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으나, 동티모르(20위, 양호)와 대만(27위, 양호)의 위상이 눈에 띈다. 평가 결과를 보고 나니 우울해진다. 언론 자유는 인간 자존권의 기본이어야 한다. 차단은 소통을 배제하고 강요를 포함한다. 물리적 검열이 강화되면 구성원들은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스스로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엊그제 OpenAI GPT-4o 새 버전이 출시되었다. 사람처럼 인식하고 반응하며, 문장의 행간을 정교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놀랍다. 낯선 언어를 바로 통역하며, 화자의 말을 끊고 파고들어 가기도 한다. 마치 생물 같은 존재감이다. 뉴미디어의 발달은 레거시 언론의 퇴출을 가속하고 있다. 뉴미디어 이용자들은 기성 언론의 일방적인 전달을 거부하고 상호작용의 가치를 따른다. 그들은 스스로 기사를 선택하고 재생산하는 소비자와 생산자를 겸한다. 진실을 만날 수 있는 접근 유연성이 본질이다. 굳은 방식의 보도를 대하면 벽을 만난 것처럼 갑갑해진다. 일방성에서 오는 거부감일까. 창의적 상상력은 생각이 자유로운 상태에서만 온전하게 작동한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발상의 근본적인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스톤 감독은 마지막 전투 장면을 거친 음악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피격되며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는 엘라이어스의 느린 동작에다 비장한 음색의 ‘아다지오’를 겹쳐놓은 명장의 예술성에 감탄한다. 유연한 것에는 힘이 있다. 영상의 피날레와 선율의 침착성 사이에 든 비대칭적 어울림이 압권이다. 그의 작품으로 우리는 깨달음을 얻는다. 강해 보이는 것이 반드시 강한 것은 아님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의 지성을 다시 반추해 본다. 경직된 태도는 세미한 음성을 이기지 못한다.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창의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