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수칼럼] 침묵, 고요를 넘어

2024-06-16     주용수

피아노 연주자가 건반에 손을 대지 않고 악보만 바라본다. 악보에는 음표가 전혀 없고 침묵을 지시하는 단어 ‘TACET’이라고만 적혀 있다. 연주자가 시간에 맞춰 피아노 뚜껑을 여닫으며 33초, 160초, 80초의 3개 악장을 구분하는 것이 연주 방법이다. 공간의 미세한 소음 부스러기들이 침묵 속에서 작품을 생성하는 일종의 순간 즉흥곡이다. 이 작품은 악기 편성이 특정되지 않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도 한다. J. 케이지는 작품 ‘4분 33초’(1952)로 20세기 서양음악을 대하는 사유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청중은 이 퍼포먼스에서 악기 소리(sound)가 아니라 주변 소음(noise)을 듣게 된다. 그 순간의 침묵은 공간 안에서 의미가 새로 정의된다.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평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던 일상의 소음들이 작품의 주요 소재를 이루는 것이다. 악곡을 구성하지 않으므로 생경한 결과물이 나오고, 청중은 공간의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1952년 8월 29일 뉴욕은 궂은 날씨로 공연장 외부가 소란했고, D. 튜더의 첫 피아노 퍼포먼스는 거칠게 기록되었다. 바람 소리, 빗방울 소리, 웅성대는 소리, 발자국 소리가 초연 연주자로 음악사에 이름을 올렸다. 매 연주마다 동일한 음향이 반복되지 않는 점이 재즈와 닮아 있다. 우연성을 품은 이 즉흥 연주는 마치 빈 액자 프레임에 이런저런 풍경을 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음악은 개인 관점에 따라 다른 개념으로 다가온다. 케이지는 예술에 대한 주관성과 사적 경험의 상대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짚어준다. 길들여진 음악 관념을 깨고 ‘세상의 모든 울림이 소리’라는 명제에 우리가 접근하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 무대 위 음향의 결과물에는 본래 공간 소음이 포함되어 있지만, 늘 소음을 제거하고 의도한 소리만을 채택한다. 그렇게 묵살된 소음들만 따로 모으면 케이지의 이 작품이 되는 셈이다. 곡을 짓는 것은 소리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술이다. 소리 개념의 한계를 없애는 것은 사물이 가진 가치의 범주를 넓히는 것과 같다.

‘말 없음’은 단절이 아닌 다른 표현이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짙은 소통을 경험하게 된다. 침묵의 의미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포함한다. ‘소리 없음’ 안에서 말보다 더 깊은 감정을 나눌 수 있다. 젖을 물리고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는 조용한 미소만으로도 의미 있게 서로 교감한다. ‘드러냄’에 길들여지면 적막한 순간을 잘 견뎌내지 못한다. 악기를 놔둔 채 주변 소음만으로 지어낸 음악이 마냥 낯설고 어색한 이유다.

P. 그로닝 감독은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에 알프스 그랑드 샤르트뢰즈 사원의 일상을 담았다. 고독한 공간에서 수도사들은 침묵으로 신과 대화한다. 이 영화는 침묵이 단순한 고독이 아니라, 깊은 소통의 수단임을 소리 없이 보여준다. 침묵 속에서 수도사들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며, 그것으로 신의 존재를 느낀다. 그들은 세월을 잊고 영원성을 숭앙하며 지낸다. 지루함의 한계를 지나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본다. 시간을 적막에 매어둔 그들의 표정은 엄숙하게 투사되고, 화면은 수도사의 일상을 멈추어 있는 영사기처럼 그저 중계한다. 대사 없이 흘러가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수도원에 머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케이지의 ‘4분 33초’는 침묵으로 자율성과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한다. 악기 연주자는 음악의 주체가 아니며 그저 침묵을 매개로 한 편성의 일부로서 작품 안에서 기능한다. 청중은 침묵 안에서 자기 경험을 생성하는 능동적 존재가 된다. 이 과정으로 침묵은 다의성을 품은 다른 개념의 수단으로 바뀐다. 이 작품은 익숙함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대중 인식에 불편함을 던져줌으로써, 낯선 예술의 수용 범위를 건강하게 확장하도록 돕는다.

음표가 가속장치라면 쉼표는 제동장치에 비유할 수 있다. 상반된 두 존재는 우열 없는 가치 위에서 마디의 단위를 완성한다. 소리와 소음이 음표를 채우고, 무음과 소음이 쉼표의 시간을 지킨다. 서사가 억제된 ‘위대한 침묵’과 울림이 소거된 ‘4분 33초’는 영상과 음향의 역설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라고 새긴 마리아컬름 사원을 기억하며, 민(民)의 침묵이 가진 묵시적인 명령의 무게를 새삼 주지한다. 침묵은 고요하게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창의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