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관칼럼] 언어의 쓸모

2024-07-16     차종관

최근 모 어린이집에서 학부모로부터 "우천시가 어디예요?"라는 질문을 받은 어린이집 교사가 깊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땅을 여행하는 동안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을 소환한 적이 있었다. 당황스러웠던 교사의 입장은 같은 문화 내에서 언어의 ‘불충족성’ 때문에 그 다급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온몸으로 "광대한 말의 과잉상태를 헤집고 나가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문해력의 부재는 결국 대화의 범위가 광대하며 말의 과잉상태를 유발하게 되어 언어의 불투명성이 발생하므로 단지 기호의 교환에 머물게 된다. 거기에 의미의 실재성은 부재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코기토(Cogito, 사유)를 사용하여 자기 성찰의 행위를 시도했다. 그는 성찰의 행위는 명석 판명한 생각을 획득할 수 있게 하므로 그것으로 인간 주체의 능력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식은 이제 의미의 닻이 되며, 해석은 저자의 마음에 있었던 것에 대응하느냐 그렇지않느냐에 따라 정확하거나 부정확한 것이 된다.

여기서 "나", 즉 저자는 전혀 해석할 필요가 없어진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에 직접적이고 아무런 매개 없이도 접근하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하여 이미 비매개적으로 알고 있다. 데카르트적인 주체는 예외 없이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알고 있음을 전제하며,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미는 주체의 의식에 비매개적으로 현전(現前)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해석에서 "저자가 그렇게 말했다"라는 것이 모든 의미를 결정하게 되었다. 언어는 이미 거기 있는 사물을 그 자체로 표상하는 게 아닌,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드러나지 않았을 측면을 드러나게 한다. 우리는 기호와 소리와 모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매개되는 ‘정신’, 즉 어떤 실제적인 현존을 추구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텍스트 안의 의미성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

언어와 성찰의 관계는 무언가를 본질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와 헤르더(Johann G. Herder)에 의하면, 성찰이란 단지 환경의 자극에 의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동물적 반응이 아닌, 무언가를 본질로 파악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때 성찰은 언어와 언어에 앞서는 것 사이의 차이를 의미한다. 언어는 이미 거기에 있는 사물을 그 자체로 표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측면을 결코 드러나게 할 수 없다. 독일 철학자 하만(Johann G. Hamann)은 "세계는 서로 다른 언어의 자원에 따라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본질적인 ‘세계-내적 존재’를 특징짓는 이해의 구조인 ‘~로서’가 되는 것이다.

인간 언어는 사물을 고립된 존재가 아닌, 인간의 실천이라는 망(網) 안에 존재하게 하고,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가 다른 사물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한다. 언어는 부분적으로 몇 개의 단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조각조각 이해될 수도 없다. 각 조각은 다른 조각과 관련해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야말로 "광대한 말의 과잉상태"를 의미로 만들기 위해 정합적 사유라는 의미에서 이성을 필요로 한다. 이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 가능성의 조건으로 언어가 필요했다.

헤르더는 "언어가 있기 전에 이미 언어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언어의 발명에 이성이 필요하므로 그 누구도 자기 힘으로 언어를 발명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결국, 로고스 중심적 시대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에게 이성이 부여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지성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이제 로고스는 이성과 언어를 선물로 인류에게 주었고, 그것으로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우리 본성 자체가 본유적으로 언어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 속성이 언어를 발명하게 했고, 언어에 의해서만 잠자고 있던 선물인 인간의 이성이 깨어날 수 있었다. 이런 논증에 언어의 쓸모를 반증하는 가다머의 진술이 의미를 더한다. "인류 문명의 기초는 수학이 아니라 인간 언어적 본성임이 분명하다."

차종관 세움교회 담임목사(전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