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관칼럼] 교양의 쓸모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의 쓰레기 수거원들의 미담이 SNS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들은 도시 전역을 다니며 쓰레기를 수거하는 동안 버려진 책들도 수거했다. 쓰레기와 함께 버려진 책들이 자주 그들의 눈에 띄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거리가 됐다. 그들은 책들이 매립지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책을 구출(rescuing)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거된 책들을 동료와 가족들이 공유했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책을 소장하기에 벅찰 만큼 많아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버려진 벽돌공장에 이웃 주민을 위한 공동 도서관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도서관은 주님들의 명소가 될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허름한 서고에는 다양한 책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쓰레기 수거원들은 다양한 책을 이웃에게 제공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개조된 쓰레기 트럭에 이동식 도서관을 갖추기까지 했다. 벽돌공장 공공 도서관은 지역 사회의 허브가 됐고, 아이들 어른 할 것 없이 문해력과 독서의 즐거움과 교양을 증진하는 장소가 됐다.
세상은 종종 단순히 사회적 규칙성으로 무엇을 판단하거나 귀납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 사안에 관한 결과를 만든 원인 탐구나 그것을 이해하려는 것에 매우 인색하다. 심지어 자기반성은커녕 문화적이라는 이름으로 변명하곤 한다. 하지만, 문화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타자와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갖도록 하고 그들의 입장이 돼보게 하는 기능을 한다. 쓰레기 수거원들의 작은 관심이 그들의 사회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화적 반향을 일으킨 예가 바로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 수거원들에 무슨 문화적인 교양이나 도덕적 감수성이 있을지 기대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그들이 벌인 일은 사회의 적잖은 관심거리가 됐고,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일깨움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본래 교양이라는 말의 어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교양은 자연적 소질과 능력을 계발하는 방식을 의미할 뿐이다. 독일어에서 교양이라는 말은 본질 이전의 구조의 효과를 뜻하는 말이다. 그것은 다시 형성(formatio)이라는 의미로써 무엇이 이룩되는 과정을 가리켰다. 어떤 과정이 이룩하는 효과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나 권위 등이 뒤얽힌 현실 속에서 선택과 평가가 이뤄지는 일종의 감지력이 요구된다. 교양을 쌓는 것은 교육(주입)이 아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일련의 매체를 통해 지금의 상태를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다. 단,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양이란 내용이 아닌, 교양 이전과 이후라는 반성의 형식이 중요하게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튀르키예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쓰레기 수거원들이 벌인 일은 사회적 교양을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곳에서, 그곳을 통해 시작되는 독서 행위는 그들에게 이질적인 타자들을 만나는 과정이 될 것이며 그들의 문화에서 규정됐던 것들 외의 다른 요소들을 발견하게 되는 감지력을 그곳의 독자들에게 선물할 것이다. 그때 주민들은 단지 개별적인 것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 보편적 관심에 이끌림을 받을 것이다. 독서, 예술작품 감상 등이 교양에 도움이 되는 것은 타자 혹은 낯선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낯선 시선이 익숙한 이해방식을 깨뜨리므로 이전보다 정확하고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준다. 이렇듯 다른 관점에 대한 열린 태도가 내 안에 쌓여가는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한 절도와 때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한 보편적 감각이 생기게 된다. 교양은 이런 점에서 자신을 넘어 보편성으로의 고양을 이끈다.
교양이란, 인간의 삶의 흔적으로 축적된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의미하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학문, 지식, 그리고 사회생활의 바탕으로 이뤄지는 품위를 일컫는 말이다.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진정한 교양인은 깨인 자아상, 역사적 우연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도덕적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로 교양의 쓸모를 말했다. 교양은 곧 삶의 격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삶에 대한 우아함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아름다운 자태, 기품있는 태도, 그리고 품격 있는 말투는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 육체적 지성을 포함한다. 교양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비로소 세상과 편안하게 지내는 힘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차종관(세움교회 담임목사, 전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