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명칼럼] 타자의 얼굴

2024-10-01     차종관

"만약 고속도로 순찰대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어르신은 어디까지 걸어가셨을지 그때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며칠 동안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 3월 어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고속도로 갓길 걷는 할머니"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출장을 가던 A씨는 정안알밤휴게소에 들러 잠시 쉰 후에 바삐 가던 길을 위해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손에 쥐고 등에는 작은 가방을 멘 채 혼자 걷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싶었지만 촉박한 시간 때문에 그냥 지나쳤다. 할머니를 지나친 A씨는 혼자 걷는 할머니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경찰에 신고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A씨는 길에서 뵌 할머니 소식이 궁금하여 경찰에 전화해 그날 상황을 문의했다. 경찰은 A씨의 신고를 받고 고속도로 순찰대에 연락했고, 할머니를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고속버스를 타고 정안알밤휴게소에서 환승을 하려던 할머니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목적지인 논산까지 걸어가려고 했다. 논산고속버스터미널까지는 총 63km 거리에 있었고, 할머니 걸음으로는 약 12시간 20분 걸리는 거리였다. A씨는 "만약 고속도로 순찰대가 할머니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르신은 어디까지 걸어가셨을지 그때 생각이 계속 났다. 시간이 지나고 며칠 동안 계속 생각이 났다"고 말하며 "처음 할머니를 목격했을 때 바로 차를 세우고 여쭤보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실망스러웠다."라고 말했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실존에 변화를 가져다준다."라고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말했다. 현대인들은 어느 시대보다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에서 뛰어난 면모를 발휘하지만, 정작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말로만 표현할 뿐 그들의 의식 속에서 타인은 그냥저냥 흩어져 있는 사물이 되어가는 듯하다. 무엇이 옳은 것보다, 무엇이 나에게 이익이 될지를 먼저 생각하는데 밝은 것이 현대인이라고 어느 나이 많은 철학자는 말했다. 각종 방송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짝을 찾아주는 리얼리티 쇼가 흥행하지만, 정작 현대인들은 타인에 의하여 건드려지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사회적 현상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 창세기 2장은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설명하며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한 후, 모든 생물을 아담에게 데려왔다. 아담은 각각의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성경은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인간이 사물의 이름을 부르자 그 이름은 곧 그것의 의미가 된 것이다. 이는 마치 김춘추의 시 "꽃"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성서는 기록하기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구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의 몸 일부를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여 아담 가까이 오게 했다. 그때 아담은 하와를 보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경탄하며 또 다른 존재를 경이롭게 맞이했다. 미국 출신의 캐나다 신학자였던 유진 피터슨은 이 성서 구절을 번역하기를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 중의 뼈,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 자기 구현을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결코 혼자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타인에 의하여 신체적이든, 정서적이든 건드려질 때 비로소 행복을 경험하는 존재다. 이는 곧 타자에게 건네지는, 타자에 대한 질문으로서 초월에 대한 직관의 출현이다. 초월은 분리된 것과 맺는 관계의 역설이다. 왜냐하면, 초월은 거리가 주어지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단절과 퇴행, 소외와 불행이라는 끊어진 거리를 다시 메우고 타자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관계의 개선과 회복이라는 것이 곧 타자와의 거리 좁힘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마쳐질 즈음, 어느 일간지에 에스토니아의 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유모차 끌며 스마트폰 빠진 엄마...그들 자녀 충격 결과"라는 제하의 기사였다. 유모차와 엄마는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다. 하지만, 기사가 전하고 싶은 것은 엄마는 한 손으로 유모차를 붙들고 있을지언정, 아기와의 정신적 거리는 광년만큼의 거리였던 것이다. 유모차와 엄마 사이에 놓인 스마트폰은 이미 그 의존의 형태에서 양자 사이의 거리를 결정해버렸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관계의 역설이라는 초월은 신비적 정신상태를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라고 말한다. 진정한 초월은 인간 주체성의 탄생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의 거리가 결정하니까.

차종관 세움교회 담임목사, 전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