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전통사찰] 마음 속에 연꽃 한 송이 피우라 하네

⑪ 수원 봉녕사

2024-10-03     박찬희
봉녕사 전경. 사진=박찬희

◇광교산 기운 담긴 봉녕사=어제처럼 오늘도 하늘이 파랗다. 기온도 꽤 내려가 웬만큼 걸어도 땀이 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기분 좋은 날, 수원에 있는 봉녕사로 향한다.

필자에게 봉녕사는 낯익지만 낯선 곳이다. 어렸을 때 봉녕사와 이웃한 동네에 살아 종종 자전거를 타고 봉녕사 뒤 산길을 달렸다. 그때 봉녕사가 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산길을 달리기에 바쁜 아이에게 그곳은 먼 곳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신나게 내달렸던 길은 광교신도시로 바뀌었다.

봉녕사 일주문. 사진=박찬희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된다는 말처럼 절도 그런 것 같다. 봉녕사로 들어가는 길에 접어들자, 산길을 달리며 느낀 짜릿한 옛날 옛적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 발걸음 가볍게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에는 ‘광교산 봉녕사’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광교산은 수원을 듬직하게 지켜주는 산이다. 광교산의 좋은 기운이 산을 타고 일주문을 지나 봉녕사로 이어진다.

봉녕사 무지개 호수. 사진=박찬희

봉녕사가 눈에 들어오자 잠시 멈춰 선다. 길을 따라 쭉 늘어선 보통 절과 달리 봉녕사는 부채처럼 퍼져나갔다. 절 뒤로 낮은 산이 포근하게 감싸안아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옛 마을 같다.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노느라 밥 먹을 때도 거르고 저녁이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마을 말이다. 이곳이라면 느릿느릿 걸으며 길가에 핀 꽃도 보고 하늘도 올려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를 들어도 좋겠다. 일주문을 지나며 느려지던 세상의 시간과 속도는 이곳에서 더 느려진다. 아니 여유로워지면서 다른 속도로 내달리던 몸과 마음이 비로소 하나가 된다.

봉녕사의 역사는 고려 희종 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성창사였고 1400년에는 봉덕사로, 1469년에는 봉녕사로 바뀌었다. 그 후 순조 때 봉녕사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이 봉녕사에서 멀지 않은 화성행궁에 만들어졌다. 이때 봉녕사는 화령전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 중창 불사가 있었던 듯 절에는 이 시기의 불화가 전한다. 봉녕사의 긴 역사 동안 이 땅 위에 얼마나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머물다 갔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봉녕사 진신사리금탑. 사진=박찬희

◇흔들리기 쉬운 세상, 늘 중심 잡아줄 듯=생각을 멈추고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탑을 본다. 탑은 ‘불(佛)’자가 새겨진 거대한 돌이 받치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 탑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탑의 이름은 봉녕사 진신사리금탑으로 이 탑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받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절은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만큼 드물기 때문에 진신사리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일까, 쉬지 않고 탑을 도는 불자의 발걸음이 더욱 간절해 보인다.

탑 뒤로 거대한 전각이 있다. 이 전각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상당한 규모의 전각이 자리를 잡았다. 보통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전각인데, 무엇을 하는 곳일까? 탑 뒤의 전각은 우화궁(雨花宮)이다. 우화는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우화궁에는 봉녕사 승가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비구니 스님이 공부하고 수행하는 교육기관이다. 다른 전각은 청운당(靑雲堂)으로 현판에는 ‘비구니계율근본도량 금강율학승가대학원’이라고 쓰였다. 이곳은 비구니 스님이 계율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곳이다. 절 입구부터 차분하고 흐트러짐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싶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봉녕사 청운당=사진=박찬희
묘엄 스님을 기리는 시. 사진=박찬희

이러한 봉녕사의 가풍은 누가 만들었을까? 봉녕사의 주 불전인 대적광전으로 가는 길 초입에 큰 바위가 놓였다. 바위에는 ‘세주묘엄 스승님께 올리는 조시’라는, 묘엄 스님을 기리는 시가 새겨졌다. 묘엄 스님은 1971년 봉녕사에 주석한 이후 봉녕사를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비구니 스님이 체계적으로 수행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강원(승가대학)을 열었다. 또 율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금강율원(승가대학원)을 만들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스님 율학 교육기관이었다. 필자가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내달리고 있을 때 스님은 봉녕사에 탄탄한 길을 냈다.

봉녕사를 반석에 올려놓은 스님은 2011년 열반에 들었다. 이듬해 스님을 기리는 세주묘엄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2018년에는 봉녕사 룸비니동산 송림에 스님의 부도와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졌다. 시를 읽은 후 스님의 부도가 모셔진 언덕을 올랐다. 흔들리기 쉬운 세상에서 늘 중심을 잡아줄 듯 굳건한 부도와 비석이 맑은 초가을 빛을 받아 눈부시다. 스님의 삶을 닮아서일까, 부도와 비석을 두른 소나무들도 굳세고 의연하다.

봉녕사 약사보전. 사진=박찬희

◇잔잔하고 고요한 마음 갖게 하는 절=짧게나마 봉녕사의 역사를 걸은 후 무지개가 빛나는 호수를 건넌다. 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떨어지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시원하다. 힘찬 물소리에 탁하고 찌든 마음이 씻기는 것 같다.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에 이른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노사나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다. 대적광전을 보자마자 눈이 환해지고 마음이 밝아진다. 꽃밭에 꽃이 활짝 핀 것처럼 문창살 가득 꽃이 피었다. 문창살뿐만 아니라 전각을 두른 벽화도 놀랍다. 화엄경의 설법 장면이 가득한데, 천천히 벽화를 살펴보며 의미를 찾는 사이 대적광전을 한 바퀴 돈다.

대적광전 오른쪽에 있는 용화각으로 간다. 용화각은 미륵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이 안에 모셔진 부처님과 보살이 예사롭지 않다. 1995년 대적광전 뒤쪽에 전각을 지으려고 터를 닦다 땅 속에서 이 삼존불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땅 속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때문이었인지 상호는 자세히 알아보기 어렵다. 용화각에는 끊임없이 불자들이 들어와 예불을 올린다. 지극한 마음으로 예를 다하는 불자들을 보자 흐릿한 부처님의 상호에서 어느 순간 미소가 번지는 것 같다.

봉녕사 대적광전. 사진=박찬희
봉녕사 용화각 석조삼존불. 사진=박찬희

용화각의 삼존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이다. 약사보전에서도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을 만난다. 약사보전은 약사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다. 전각 안에는 약사 부처님 좌우로 여러 점의 불화가 봉안되었는데, 이중 신중탱화와 현왕탱화가 경기도의 유형문화유산이다.

약사보전은 먼지 하나 없는 것처럼 정갈하다. 마음을 다하는 섬세한 손길이 절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일 거다. 사실 약사보전뿐만 아니라 봉녕사 전체가 그렇다. 때문에 소란스런 마음도 일단 절에 들어서면 잔잔해지고 고요해진다.

봉녕사 사찰음식대향연 개최를 알리는 플래카드. 사진=박찬희

◇사찰음식에 담긴 따뜻한 마음=절을 둘러본 지 몇 시간이 흘렀다. 밥때를 놓친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인지 사찰음식대향연 개최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잘 보인다. 봉녕사에서는 일찍부터 음식의 중요성을 알고 건강한 사찰음식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묘엄 스님의 각별한 관심으로 2009년에는 제1차 사찰음식대향연이 개최되었다. 봉녕사에서는 사찰음식과 관련 의례를 통해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 음식에 담긴 여러 사람의 수고로움, 함께 나누는 삶, 욕심부리지 않는 자세를 대중에게 전해주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해마다 대향연이 열리고 사찰음식을 널리 알리고 배울 수 있는 사찰음식 교육관인 ‘금비라’가 탄생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찰음식의 참뜻을 나누기 위한 행사가 열린다. 4일과 5일에 열리는 ‘2024년 제15차 봉녕사 사찰음식대향연’이 그것이다. 올해의 주제는 ‘사찰의 자연발효음식’이다. 행사는 매우 다채롭게 구성됐다. 4일에는 사찰음식 전시, 사찰음식 경연대회, 비빔밥 퍼포먼스, 육법공양, 사찰음식 실습 특강, 차명상, 탁발순례, 무아차회가 열린다.

묘엄 스님의 부도와 행적비. 사진=박찬희
봉녕사 사찰음식 교육관 ‘금비라’. 사진=박찬희

5일에는 금비라 졸업식, 차 명상, 육법공양, 사찰음식 실습 특강, 탁발순례, 무아차회, 사찰음식 경연대회 시상식, 진관사 비천무 예술단과 봉녕사 우담화 합창단이 꾸미는 공연 한마당이 이어진다. 특히 탁발순례는 수행과 보시라는 뜻을 잘 담아낸 행사로 주목된다. 세주묘엄박물관에서도 행사가 열리는 이틀 동안 특별전이 개최된다. 특별전 주제는 ‘근현대의 고승들이 묘엄 스님에게 남긴 서화’다. 특별전은 묘엄 스님의 뜻과 교류 관계를 살펴보기 좋은 기회일 듯싶다.

봉녕사를 떠나기 전 절을 뒤돌아본다. 이제 보니 봉녕사는 활짝 피어난 연꽃이다. 절에 온 사람들은 누구나 맑고 향기로운 기운을 받아 절을 떠날 때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렇게 연꽃 한 송이를 마음에 담고 일주문을 나선다.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