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여행] 발안과 반월 사이

2024-10-30     김선희

"악! 기사님 내려 주세요." 무릎에 바퀴벌레라도 기어간 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려 달라고 소리치는 나를 보고 버스 기사님은 기도 안 차듯 흘낏 쳐다보고는 "곧 승강장입니다. 거기서 내리세요"라고 단칼에 무 자르듯 대답한다. 왜 아직 도착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반월이 아닌 발안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었다.

큰애가 취업하여 독립하였는데 아침을 거르고 간다는 소리를 듣고, 미숫가루라도 한 잔씩 타 먹고 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마침, 친구가 미숫가루 만들자는 연락이 와서 몇 가지 잡곡과 찹쌀을 챙겨 이른 점심을 먹고 수원역에서 버스를 탄 시간은 낮 12시 경이었다. 친구의 단골 방앗간을 가기 위해 반월역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길을 나선 것이다. 차라리 버스의 종점인 발안 터미널에서 내렸으면 수원도 반월도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기억의 회로는 한번 브레이크가 걸리면 계속 오류가 나는 법인지 나름 멍청하지 않다고 자부한 그 시간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허겁지겁 내린 승강장은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는 도로 양쪽으로 논밭이 펼쳐진 낯선 곳이었다. 간신히 숨을 고르고 버스 노선을 보니 다행히 안산을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일단 안산에 가기로 했다. 한참 동안 기다려 탄 버스는 구불구불 또 한참을 달리더니 안산 시내로 접어들었다. 최대한 전철역이 가까운 정거장에서 내려 달라며 운전석 옆 쇠기둥을 잡고 선 나는 반쯤 넋이 나간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별로 무겁지 않게 길을 나섰던 시장 가방 속 곡식의 무게가 천 근, 만 근처럼 축 늘어져 처진 어깨를 하고 반월역에 내린 시간은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였다. 정오가 되기 전 집에서 나와 무려 5시간 동안 반월을 오기 위해 헤맨 것이었다. 반월역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귀는 반월로 듣고 몸은 발안을 향해 가고 있었던 혹독한 자책감의 눈물이었다.

친구는 그동안 미숫가루를 다 만들었고 다시 방앗간에 가서 내 미숫가루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집 잘 찾아가라는 당부와 함께 수원역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다. 반월을 오기 위해 마치 지구 반 바퀴를 돌고 온 듯한 하루였지만 발안과 반월 사이는 수원을 가운데 놓고 멀고도 가까운 이 끝과 저 끝의 사이일 뿐이었다.

반월에서 수원역까지 오는 시간은 고작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선희 수필가

수원문인협회 회원
2020년 경기수필 신인상, 2023년 경기수필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