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수칼럼] 출생, 가족 그리고 태도

2024-12-08     주용수

죽음은 끝인가, 아니면 다른 시작인가. B. 베르베르의 희곡 ‘심판’은 영혼이 법정에서 전생을 평가받고, 그 대가를 치름으로써 삶과 죽음, 책임과 자유를 묻는다. 이 작품은 죽음과 환생 사이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처벌의 수위는 얼마나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었는가에 달려 있다. 공헌하는 삶을 산 영혼은 열반에 이르고 윤회를 멈추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심판’은 삶의 선택과 책임에 문제를 제기하며, 가족과 사회 제도의 변화를 성찰하게 한다.

베르트랑 검사가 심판대에 선 피고인을 심문한다. "천생배필인 배우자를 고르려는 노력은커녕 어울리지 않는 상대와 살았습니다. 전통과 관습에 매여 쾌락조차 거부했죠." 그의 날 선 목소리가 과거의 결정을 질타한다. "당신은 배우자, 직업, 삶을 잘못 택했어요.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한 채, 순응주의로 남들과 똑같이 살려 했죠." "평온하고 틀에 박힌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재능을 등한시하고, 운명적 사랑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사형, 아니, 다시 말해 ‘삶의 형’을 구형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자신을 평가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윤리적 한계와 자유의지의 범위를 탐구한다. 작가는 특유의 유머 코드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겁고 심오한 질문을 쉬운 언어로 관객에게 전한다. 환생할 영혼은 자신의 성별, 부모, 국적, 직업, 재능, 질병, 죽음까지 설정하여 태어날 수 있다. 부모와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가족 선택권과 책임 개념을 재해석하게 한다. 예술의 비현실성이 주는 기발한 상상력이다.

얼마나 우리의 삶이 소중하고, 각자의 재능이 가치 있는가를 작가는 강조한다. 자기 정체성을 찾지 않거나 거부하면, 해탈에 이르지 못해 다시 ‘삶’의 형벌을 받도록 판결한다. 심판은 과오 심의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되묻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관점으로 피고를 비판함으로써, 독자와 관객이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사유할 공간을 마련한다.

시대와 문화, 개인에 따라 인간의 행위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이 작품은 웅변한다. 어떤 행동이 누구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죄가 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이해되는 선택일 수도 있다. 스스로 선택했던 결정이 실은 사회 규범과 자기 욕망의 굴레 안에 머물렀던 건 아니었는지 질문함으로써, 인간의 책임감이 자유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반추하게 한다. 희곡 ‘심판’은 단순한 문학적 상상력을 넘어, 우리 자신이 삶의 의미를 규정하고, 윤리적 선택과 책임을 자문하게 하는 철학의 공정이다. 작가는 현재 삶의 가치를 재고하며, 인간 존재 의의를 탐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2020년 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에 따르면, 비혼 출생 비율은 프랑스 62.2%, 영국 49.0%, 미국 41.2%, 호주 36.5%였다. OECD 회원국 37개국 중에서 29개국이 30%를 넘었으며, 전 회원국 평균치는 무려 41.9%를 나타냈다. 우리나라 ‘2023년 출생 통계’에서 비혼 출생은 전체의 4.7%로 낮지만, 우리 사회도 변화의 기류를 타며 증가하고 있다. 주사랑공동체교회에 따르면, 2022년까지 12년간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영아는 총1천990명으로, 어린 생명이 위험에 노출된 채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 우리 사회의 경직된 관습과 제도가 이 변화를 유연하게 포용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독일의 ‘생활공동체(Lebenspartnerschaft)’라는 동거인 제도는 비혼 커플에게 세금 혜택, 의료 결정권 및 연금 수령권을 보장한다. 계약서나 공증이 있으면, 유산 상속권의 보호도 받는다. 프랑스의 ‘시민연대협약(PACS)’은 비혼 커플에게 법적 권리를 제공한다. 파트너는 자녀 부양 의무가 없고, 부채 책임도 적게 지지만, 세금 혜택, 의료보험 혜택과 연금 수령 등 사회보장제도를 보장받는다. 두 제도는 결혼의 전통적 틀이 아닌 현대적 가족 관계를 지원하며, 경제적, 법적 안정이 필요한 비혼 커플에게 적합한 선택지를 준다.

‘2024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응답이 37.2%였는데, 특히 20대는 42.8%가 찬성했다. 비혼자가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어려움 없이 육아할 수 있어야 한다. 정우성 배우가 아들을 얻었다. 새 생명이 우리 공동체로 진입한 것이다. 비난의 손가락질을 거두고, 혼외자라는 차별의 명칭도 쓰지 말아야 한다. 아이의 출생은 축복이다. 누가 이 아이에게 주홍 글씨를 달 권리를 가졌는가. 환생의 ‘심판’ 다이빙대에 올라선 그의 아들은 아마도 대한민국 국적, 남자, 잘생긴 부모, 세인의 관심, 언론 특종, 수려한 용모, 경제력을 내세의 운명으로 설정했는가 보다.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창의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