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관칼럼] 프렌치 수프, 그리고 맛과 멋
외제니와 저는 가을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우린 인생의 가을에 있지만 우울함 따위는 없습니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결혼할 것입니다. 가을의 장미는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죠." 도댕은 외제니와 결혼하게 될 가을을 예찬하며 식사에 초대된 친구들 앞에서 사랑하는 그녀와의 아름다운 결합을 꿈꾸는 풍요를 예찬했다. 가을이란 소박한 즐거움을 느끼는 여름에서 알찬 기쁨을 느끼는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도댕은 말한다. 그는 자신과 외제니의 만남과 결합이 조금 늦은 것에 대하여 변명이 아닌 자신들의 인생이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결실하게 되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상은 영화 ‘프렌치 수프(The Taste of Things)’의 주요 대사다. 19세기 프랑스의 음식 문화와 프랑스 사람들의 음식에 대한 진심을 담은 영화로써, 유명 요리사인 도댕 부팡과 20년을 그의 집 요리사로 일하는 외제니의 일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북미 스타일의 빠르고 간편하며, 푸짐함과는 거리가 먼, 우아하고 효율적인 템포로 전개되는 특징을 갖는다. 주방의 특징인 시끄럽고 소란하며, 그릇과 그릇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파열음보다는 오직 요리만을 위한 소음과 자연의 소리가 관객의 눈과 귀를 곧추세우게 한다. 두 요리사와 한 사람의 시종이 일사불란하게 눈짓과 손짓만으로 음식을 조리하는 데 몰두한다. 감독의 낭비 없는 동선과 절제미가 부엌 안과 밖을 교대로 비추어 주며 영화는 고즈넉한 분위기로 가득 찬다.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댕과 그의 집 요리사인 외제니를 부부로 착각하게 한다. 그만큼 두 사람이 선보이는 요리와 주고받는 표정과 눈빛은 강한 친밀감을 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요리에 대한 진지함이 곧 그들의 삶이며 관계성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하는 장면이다. 도댕의 미식가 친구들을 청하여 푸짐한 요리를 대접한 날을 배경으로 나온다. 친구들의 허기진 배가 차오를 대로 차오른 푸짐한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외제니가 없었던 게 큰 아쉬움이라도 될 듯 속상해한다. "나는 요리를 통해 대화에 참여합니다." 외제니가 인사한다. 외제니는 20년 전 도댕의 집에 요리사로 채용되어 요리를 통해 인근에 소문난 요리사가 되었다.
영화는 까다로운 미식 연구가 도댕이 선뜻 받아들인 천재 요리사 외제니와 넓은 부엌에서 겹치지 않는 동선을 유지하며 각각의 음식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우아하게 영화 초반에 등장시킨다. 두 사람이 일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부엌의 모습과 다르다. 큰 부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시끄럽고 복잡하게 무언가를 주문하거나 요구하는 게 없다. 그곳에는 마스터 셰프와 수습 셰프들 사이에 차별과 구별이 없고, 오직 두 사람의 정성스럽게 조리하는 행위만이 부드럽고 일정한 템포로 펼쳐진다. 다만, 재료를 굽고 찌고 볶고 끓이는 소리가 부엌 밖에서 들려오는 새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 벌레 울음, 그리고 개구리의 울음 등과 뒤섞여 하나의 심포니를 연상하게 한다. "아웃스탠딩(outstanding)!"
영화는 그 고장에서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고 칭송받는 도댕과 요리 천재 외제니가 다양한 음식으로 평등한 사랑의 관계를 모색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영화의 모든 화면 하나하나는 마치 인상파 화가의 빛과 자연을 조화롭게 표현한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런 화면 속 여름의 푸르름과 풍요로운 가을빛 영상은 두 사람의 일과 사랑이 풍요롭게 성숙해 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음식에는 먹는 철학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사물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행위가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프랑스 요리사인 피에르 가니에르는 "요리는 영원한 탐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요즘 비스킷은 요기가 아니라 심리학의 한 분야입니다"라는 영국 비스킷 ‘모먼트(Moments)’의 디자인 책임자의 말을 전한다. 주방은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곳이다. 그곳은 풍미 가득한 맛과 멋을 가진 음식으로 허기뿐만 아니라 마음을 달래주는 곳이다. 인생에 음식이 빠지면 안 되듯이, 좋은 음식과 인생은 어울림이 있다. 음식이란 단순하게 소화를 위한 연료가 아니다. 그것은 심리적 허기를 채우며 기울어진 영혼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예술 행위일지 모른다. 그래서 추운 계절 소박하지만 따뜻한 음식이 놓인 소반(小盤)을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차종관 세움교회 담임목사, 전 성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