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웅칼럼] 도원수(都元帥)가 도망가는
역사를 통감이라고도 합니다. 통감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줄임말입니다. 중국 송나라 사마광(司馬光) 등이 지은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책입니다.
자치통감이라 함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 즉 치도(治道)의 자료(資料)가 되고 역대 왕조를 통(通)하여 잘잘못을 비추어 보는 감(鑑), 즉 거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역대의 사실을 밝혀 정치규범으로 삼는다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우리 민족의 최대의 수난과 위기의 역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꼽을 수 있습니다. 왜적의 야만적 포악한 한 침략전쟁으로 한양의 궁궐은 잿더미가 되고 백성들은 학살 당하고 재물은 약탈되고 모든 문화재는 소실되는 최악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조정의 최후의 보루인 왕과 신하들은 백성을 버린 채 피난할 곳을 찾아 피난길을 헤매며 치욕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런 처절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서애 유성룡 선생은 임진왜란사를 썼는데 통감이라 하지 않고 징비록(懲毖錄)이라 하였습니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고 한 시경의 한구절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 징비록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임진왜란 전쟁사라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 사실((史實, historical fact)을 옮겨 보겠습니다.
"초3일에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니 유도장(留都將, 임금이 거동할 때 서울을 지키는 대장) 이양원(李陽元)과 원수(元帥, 전시 군을 통솔하는 장수) 김명원(金命元)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중략) 도원수(都元帥, 전쟁 시 군사권을 도맡은 최고사령관) 김명원은 제천정(濟川亭, 한강가에 있는 왕실의 별장으로 사신을 접대하던 정자)에 있다가 적병이 오는 것을 보고 감히 나가서 싸우지 못하고 군기(軍器, 병기)와 화포(火砲)와 기계(器械, 도구와 기물)를 전부 강물 속에 집어 넣고 옷을 갈아 입고 도망치려고 하니 종사관(從事官, 종6품) 심우정(沈友正, 죽은 뒤 이조판서 추증)이 굳이 말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이양원은 성중에 있다가 한강의 군사가 이미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또한 양주로 달아났다."
요즈음의 직책으로 말하면 이양원은 수도방위사령관이고 김명원은 계엄사령관이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더 놀랍고 한심한 사건은 함경도로 피난길에 오른 두 왕자가 적군에게 포위된 일입니다.
"수행했던 신하 김귀영, 황정욱, 황혁과 함경도 감사 유영립, 북병사 한극함이 다 붙잡히고 남병사 이혼은 달아나다가 갑산에서 우리 백성들에게 살해 되었으며, 남북의 군, 현은 다 적에게 함몰되었다"라고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
"두 왕자는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다. 모두 회령부에 도착하였다. 순화군은 처음에 강원도에 있다가 적병이 강원도에 들어왔으므로 방향을 바꿔서 북도로 향하였다. 이 때 적이 끝까지 왕자를 쫓아오니 회령의 아전 국경인(鞠景仁)이라는 자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배반하여 먼저 왕자와 종신(從臣, 따르던 신하)들을 포박하여 가지고 적을 맞이하였다.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 1559-1611 가토 기요마사)은 그의 포박을 군중에 머물러 두고 함흥에 돌아와 주둔하였다"라고 징비록에서 유성룡 선생은 한탄을 했습니다.
국경인이란 자는 죄목은 알 수 없으나 회령에 귀양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전으로 있었는데 임진왜란이 나서 그곳으로 피란을 간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좌와 종신을 붙잡아 적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주고 귀양으로 조정에 대해 가졌던 원한을 풀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후 품관(品官) 신세준을 중심으로 한 의병에게 국경인과 그의 일당이 잡혀 피살되었으며 그의 수급(首級)은 당시 함경도 경성을 진압하고 있던 의병대장 정문부(鄭文孚)에게 보내어져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충신이 있는가하면 역적도 있고 신의가 있는가 하면 배신도 있고 헌신과 희생이 있는가하면 눈치보며 손익을 계산하여 좌우상하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징비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유화웅 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