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칼럼] 1997년과 2025년, 두 번의 위기
1997년 겨울, 대한민국 서울의 거리는 차가운 불안으로 가득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업이 도산했고, 하루아침에 실직한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졌다. 은행 앞에는 인출을 기다리는 긴 줄이 늘어섰고, 상점 유리창에는 ‘점포 정리 세일’과 ‘긴급 매각’이라는 문구가 붙었다. 뉴스에서는 ‘한국 경제 붕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쏟아졌고, 직장인들은 점심시간마다 모여 "우리 회사는 괜찮을까?"라며 조용히 불안을 나누던 때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해법을 찾아냈다. 기업들은 체질을 개선했고, 사람들은 서로를 도우며 다시 일어섰다. 거리에는 새벽부터 신문을 파는 소년이 있었고, 부모님 손을 잡고 시장을 찾던 아이들이 있었다. 빵 한 조각을 두고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지만, 가족과 함께 밥상 앞에 둘러앉아 희망을 이야기했다. 직장에서 쫓겨난 아버지들은 다시 일어설 방법을 고민했고, 어머니들은 생계를 위해 반찬 가게를 열었다. IMF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도 삶은 멈추지 않았고, 누구도 주저앉을 수 없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길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몰락한 양반들이 서점을 운영하거나 서당을 세우며 새로운 삶을 찾았듯, 산업구조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생존의 길을 모색해 왔다. 1960~70년대 경제개발 시기, 수많은 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지만, 변화에 적응한 이들은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IMF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마다 넘쳐나던 헌책방에서 출발해 대형 온라인 서점으로 성장한 기업이 있었고,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떠난 후 작은 창업을 시작해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 변화를 읽고 도전을 멈추지 않은 이들은 결국 살아남았다.
그리고 2025년, 서울의 거리는 다시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상점 유리창에는 또다시‘임대 문의’라는 글자가 나붙었고, 명동과 신촌, 강남 곳곳에는 불 꺼진 점포가 늘어가고 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들은 빠르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개인 자영업자들은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삼중고 속에서 생활비 부담은 커지고, 기업들은 신입 채용을 줄이고 있으며, AI와 자동화가 기존의 일자리를 대체하면서 청년들의 취업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
딸아이는 매일 아침 노트북을 켜고 수십 개의 채용 공고를 훑어보지만, 지원할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렵게 면접 기회를 얻어도 경쟁률은 수십 대 일. "이렇게 힘들게 공부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한숨을 내쉬는 아이의 모습에서 IMF 당시 길을 잃고 방황했던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 겹친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할까?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하루 종일 카페에 앉아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스펙 경쟁이 아니라 더 넓은 기회다. 대기업 취업이 전부가 아닌 세상을 만들기 위해, 청년들이 창업과 신기술,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영업자들에게는 현실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높은 임대료와 물가 상승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디지털 전환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어야 한다. 오프라인 매장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시대, 온라인 플랫폼과 배달 서비스 등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구체화 되어야 한다.
이제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숨 막히는 일상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 한마디를 들으며, 누군가는 텅 빈 가게에서 전단지를 다시 정리하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켜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딸아이는 다시 한번 이력서를 정리하며 자신을 다잡았을지도 모른다. 서울대학교 이재열 교수가 최근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에서 지적했듯, 2025년의 위기는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다. 그는 "한국 사회는 머리는 시장형인데, 몸통은 신분제처럼 작동한다"라고 분석했다. 우리는 능력과 경쟁을 강조하지만, 정작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간극은 더 벌어지고 있다. 경제 구조의 변화, 그리고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노동의 의미 속에서,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가 왔고, 그리고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시대, 우리는 어디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반복할 뿐이다. 1997년에도, 2025년에도,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앵커는 뉴스를 마치며 이렇게 마무리한다.
"1997년, IMF 속에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겁니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는 모든 분께 응원의 마음을 보냅니다. 수요일 뉴스데스크를 마칩니다. 함께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김형태 성균관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