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표의 세상만사] 희망의 씨앗을 심고 싹틔우고

2025-03-30     홍승표

젖빛 뽀얀 햇살 한 자락이 눈웃음을 날린다. / 술래잡기하며 뛰어 노는 물소리 끝 / 늘어진 잠에서 깬 눈망울이 후드득 물기를 털고 / 얼어붙었던 바람 앞가슴 풀어헤치듯, / 가지마다 흐르는 수액(樹液)의 물결을 따라 / 해토(解土)머리를 넘나드는 설렘들, / 겨울의 꼬리가 감춰지는 바람의 빛과 향기 / 원(圓)을 그리며 커다란 원을 그리며 / 아지랑이 속 나비 나 비 떼… 저 눈에 넣고 싶은 / 가시 내 가시내야! / 온 누리 숨을 몰아쉬며 아지랑일 떠올린다. - 졸시(拙詩) 해빙기(解氷期) 전문

새봄이 들어선다는 입춘에 20년 넘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스승님으로부터 입춘첩을 받았지요. "물은 흐르고 꽃은 피어난다(水流花開)"는 글귀였습니다.

입춘첩은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立春大吉 建陽多慶)"는 글이 대세이지요. 그런데 수류화개라는 휘호를 내려주신 건 특별한 마음이 담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우내 고뿔 앓던 땅이 녹고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고 꽃피고 봄이 오는 건 자연의 섭리이지요. 사람의 힘으론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바꾸는 것도 난망한 일이지요. 그게 세상이치이고 순리입니다.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雨水), 왕눈이 깨구락지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입을 연다는 경칩(驚蟄),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春分)이 지났지요. 누구도 세월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입니다. 낮이 길어지고 따뜻해지면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비들이 산과 들을 날아다니기 시작했지요. 철옹성 같았던 동토(凍土)가 녹아 흐르고 아지랑이 춤을 추는 강기슭 산자락마다 빛 고운 새순이 돋아 초록빛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출렁이는 풀꽃바다를 날아드는 벌 나비들, 꽃물 든 산자락이 너울 덩실 춤을 추고 싱그러운 꽃망울의 붉은 보조개가 현기증 나도록 사랑스럽지요.

지난 겨울, 104년 만이라는 폭설에 강추위가 몰아닥쳤습니다. 꿈에서조차 상상 못 했던 일이 연이어 생겨나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지요. 큰 산불로 힘든 일도 겪었지만 변함없이 새로운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혹한의 겨울을 이겨낸 때문인지 봄날이 더없이 싱그럽고 향기롭지요. 온 누리 풀꽃향기에 취해 춤을 추고 햇무리 벅찬 숨결로 무지개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불어대는 아이들의 버들피리 소리가 들을 지나고 산을 넘어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지요. 그래도 마음은 아직 얼어붙어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옷고름 풀어 헤치고 새봄과 함께 어울리고 나뒹굴어야지요.

마음의 문을 닫아놓으면 나를 보지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밖에서 나를 바라보아야지요.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 조잘조잘 물이 흐르고 시나브로 꽃이 피는 봄입니다. 산자락 들녘에는 꽃망울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지요. 새 움트는 봄날이 참 신비롭기만 합니다. 우리 가슴에도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야지요. 꽃이 지면 열매가 익어갈 겁니다. 과거에 매달리면 미래는 없지요. 어제를 바꿀 수 없지만 내일은 바꿀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날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지요. 행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내주어도 좋고 오롯이 스며들어도 참 좋은 봄날이지요. 잠들었던 몸과 마음을 일깨워 새로운 꿈과 희망의 씨앗을 심고 싹틔우는 봄, 싱그러운 바람과 상큼한 꽃향기가 빚어내는 꿈결 같은 춘삼월입니다.

홍승표 전 경기관광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