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표의 세상만사]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 안 보시는 거 알지만 ‘폭싹 속았수다’는 꼭 한번 보세요."
풀꽃향기가 어지럽도록 짙게 날아드는 봄날, 제주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아들 녀석이 컴퓨터에 넷플릭스를 깔아주며 권해준 드라마를 하루 한편씩 만났기 때문이지요. 꿈 많고 야무진 애순과 성실한 무쇠 관식이,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작품입니다. 애순이 열 살 때, 그 귀한 전복을 먹다가 엄마 유언을 들었는데 자식 셋을 두고 떠난 엄마는 고작 스물아홉이었지요. 시인이 되고 싶은 애순은 국문학도의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는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시가 애순을 지탱해 주는 생명줄이었지요.
"천지에 단물이 들어가는 거, 그때 봄이 봄인 걸 알았더라면 더 찐하게 살아볼걸, 봄이 너무 짧은 것 같아!"
애순과 관식이의 만남은 싱그러운 수채화나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은은한 봄날 풍광이었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한 싯귀(詩句)처럼 스며들고 외마디 비명처럼 날아들었지요. 처절함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메시지(敍事)는 위로가 되고 찌든 삶의 더께를 씻어주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부모님 얼굴이 수없이 오버랩(overlap)되었지요.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 해거리로 땅을 팔아가며 여섯 자식을 공부시키는 부모님이 고마웠지만, 죄송하다는 생각에 가슴 구석구석이 저려왔지요. 두 분은 살아가는 게 전쟁이었을 겁니다.
가끔 우물가에서 어깨를 들먹이며 우시던 뒷모습이 생생하지요. 죽어라 일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으니 사는 게 한스러웠을 겁니다. 뒤늦게 고등학교엘 들어간 저는 열심히 일을 도왔지요. 고교 졸업 전에 공무원이 되고 독학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 "미안하다. 대학엘 보내주지 못해"라고 하면서 눈물짓던 부모님! 힘든 세월을 기적처럼 견뎌낸 아버지는 예순둘 아까운 나이에 하늘로 떠났습니다. 살아생전 고맙고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한 게 사무칠 따름이지요. 그동안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지내실 거라 위안을 삼으며 지낸 불효자인 저도 어느새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도, 하루하루 쌓이면 그게 인생이여!"
‘폭싹 속았수다’는 오늘의 우리들을 있게 해준 어버이들의 산 역사이지요. 극한상황 속에서도 자식들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몸짓이 경이롭습니다. 애순은 최초의 여성어촌계장이 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지요. 자식을 위해 아파트와 배를 팔아치우는 애달픈 삶이 먹먹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지요. 죽을힘을 다해 사는 처절한 몸짓을 보며 울컥울컥했습니다. 그들이 온몸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한 위안이고 희망이었지요. 슬프도록 아름답고 눈물겨운 삶을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도 저절로 눈물이 흐르는 진한 감동의 순간들이 더없이 행복했지요.
"그때는 몰랐다. 칠순이 될 줄 생각 못 했는데,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어야 하는 데 왜 매일 똑같은 걸까?"
관식의 삶은 존경을 넘어 숭고함이었습니다. 무쇠 관식이 죽고 난 후, 애순은 칠순 나이에 시집을 펴냈지요. ‘시로 보면 가난도 운치 있어 보인다’고 꿈을 이룬 겁니다. 금명이가 사회명사로 TV에 출연해 특강을 하고 은명이도 정신 차리고 새 출발을 하지요. 인생은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애순과 관식은 잘 사는 게 무언지를 말없이 말해주었지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사랑의 박수를 보냅니다. 하늘나라는 한 점 번뇌 없이 자유롭고 따뜻하고 향기로운 봄이겠지요. 애순의 시집 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봄날입니다. 세상의 어버이들이여! 정말 ‘폭싹 속았수다.’
홍승표 전 경기관광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