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기석 칼럼] 내가 윤희숙이다

2025-05-01     문기석

얼마 전 윤희숙 국민의힘 여의도연구원장이 대선 정강·정책 방송 연설에서 작심한 듯 질렀다. 당일 밝힌 내용이 뭔가를 기대했던 국민의힘이나 이런저런 신경을 안 써도 잘 나가고 있는 민주당 모두에게 충격이나 긴장감은 매한가지였다. 윤 원장은 "권력에 줄 서는 정치가 결국 계엄과 같은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며, "국민의힘은 지금 깊이 뉘우치고 있다. 국민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아직도 자신이 이기고 있다는 윤 대통령의 말에 이런 윤 원장의 입장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오랜 적폐를 인정하고 청산하겠다는 선언으로 이해하고 있다. 단순한 사과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치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요청이자 정치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그래서 ‘윤희숙 다웠다’는 말이 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모든 상황의 중심에 윤 원장이 서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면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닐 것이라, 그렇다고 해서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윤 전 대통령의 주변 사람들 말은 이제 나락에 잔존해 있다. 비단 권력에 줄 서는 정치는 한국 정치사에서 뿌리 깊은 병폐로 더 이상 안 된다는 윤 원장의 말을 전부 곧이들어서도 아니다. 친윤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권력자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두려워하며, 심지어 당의 자율성과 기본 원칙까지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정치문화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수없이 많은 비극을 양산했다. 윤 원장이 언급했듯 당 대표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경선 후보를 억누르기 위해 연판장을 돌린 일들 역시 결코 가벼운 정치적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정치일정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과정들은 분명 정당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다. 아마도 국민의 정치적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중대 사건이었으리라. 특히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그 모든 문제가 극단적으로 분출된 결과로 판단된다. 당시 국힘 지도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걱정을 끼쳐 드려 사과드린다’는 식의 미흡하고 모호한 유감 표명으로 일관해 지금에 이른다. 심지어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에도 의원 다수가 탄핵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부역자 색출 소동까지 벌어진 일은 유감 이상으로 여겨진다. 이 모든 과정이 국민이 아닌 권력을 중심에 둔 정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판단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지금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예고된 한동훈의 등장에도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은 여전히 극렬 지지층의 눈치를 살피는 데 급급하고 있다. 다음 총선 공천을 위한 내부 정치에만 몰두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리는 정도다. 국민 다수의 정서와 괴리된 채 자신들만의 진영 논리에 갇혀있는 모습은 보수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할 상황이다. "계엄의 강을 건너자"는 한동훈 후보의 발언도 어찌 보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치적 생존을 위한 절박한 외침이었음에 공감대는 이제야 느끼는 정도다. 느린 것인가, 아니면 아예 외면하는 것인가 조차 감이 떨어지는 정도다. 물론 생각하기 따라 국민의힘 내부에서 뒤늦게나마 이러한 반성과 사과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다. 양대 정당 중 하나가 제 궤도를 찾지 못하면 나라 전체의 정치가 균형을 잃고 궤도를 이탈할 수 있어서다.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라도 국민의힘 변화 시도가 단순한 정당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정치 전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 여기고 있다. 다만 반성 자체에 머물러서 안 된다. 짐작하다시피 이제 국민은 정치인들이 말뿐인 사과를 믿지도 않고 기대 역시 포기한 지 오래다. 그리해 모든 진심 어린 사죄는 구체적인 행동과 결과로 증명돼야만 한다. 극렬 지지층의 눈치가 아니라 국민 다수의 뜻을 따르는 정치문화로 전환하는 일, 공정한 경쟁과 자율적 당 운영을 보장하는 정당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일만이 병행돼야 국민의힘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형식적으로 윤 전 대통령을 비판하고 민주당의 폭주를 비난하는 것만으로 정치적 과오를 감출 수 없다는 얘기다.

콕 집어 말하건대 국민의힘이 살 수 있을지 자신하기 어려워도 후일을 도모한다면 모두가 윤희숙이 되어야 그나마 희망적이다. 진정 국민 앞에 설 정당이 되기 위해서라도 권력에 대한 맹목적 충성의 문화를 청산해 나가야 민주당보다 앞선다. 알다시피 이미 민주당은 한 사람을 위한 과거의 맹종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국가 전체의 이익을 최우선에 놓는 정치로 나아가야 다시 살던지 나아갈지 할 것 아닌가. 그야말로 정당이 그 목적인 정권을 잡으려면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 국민의 대변자가 돼야 가능하다는 단순논리만 기억하면 된다. 얼마 전 같이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권력은 아무리 그 기반이 단단해 보일지라도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학습한 바다. 그래서 윤 원장의 고백은 이런 단순한 진리를 다시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됐다.

어제 선거 이상의 관심이었던 일이 생겼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됐다. 이 후보는 이제 사법리스크로 인한 후보 자격 논란과 여론 악화 등에 직면하게 됐다. 그야말로 코앞을 모르는 정치판이다. 옛말에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된다는 말이 있다. 윤희숙 원장이 짐작이나 하고 있었던 얘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