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삶] 실패를 기회로 만드는 공정한 회복의 힘

2025-05-29     이상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통신, 금융, 의료, 교통, 교육 등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디지털 기반의 서비스에 의존한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우리의 일상을 편리하게 만들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그만큼 실패가 일어났을 때의 충격도 크다. 단순한 접속 오류나 짧은 정전조차도 업무 지연, 경제적 손실, 나아가 일상을 위협하는 불안감으로 이어진다.

최근 발생한 SK텔레콤 해킹 사건은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가입자 인증 서버가 외부 공격에 뚫리면서 약 2천500만 명의 유심 정보가 유출되었고 통신망 혼선과 함께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불안감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적 사고가 아니라 국민의 일상과 안전에 직결된 국가적 수준의 서비스 실패였다.

서비스 실패는 완전히 예방하기 어렵다. 급변하는 해커의 공격 기법, 복잡하게 얽힌 시스템 구조, 그리고 인간의 실수는 언제든 새로운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얼마나 빠르고, 어떻게 공정하게 회복하는지는 조직과 사회의 진정한 역량을 보여준다. 이때 핵심이 되는 개념이 경영학에서 이야기하는 ‘회복공정성’이다. 회복공정성이란 실패 이후 문제를 수습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고객 또는 국민이 느끼는 공정성의 정도를 뜻한다. 분배공정성, 절차공정성, 상호작용공정성 세 가지가 중요한 축이다. 분배공정성은 피해 보상이 적절하고 형평성 있게 이루어졌는지를, 절차공정성은 회복 절차가 명확하고 접근가능하며 투명했는지를, 상호작용공정성은 사고 대응 과정에서 고객을 대하는 태도와 소통 방식을 평가한다.

SK텔레콤은 전 고객 대상 유심 무상 교체라는 분배공정성 확보책을 내놓았지만 실제로는 대기 시간이 과도하게 길어지고 온라인 예약 시스템이 잦은 오류를 일으키면서 절차공정성이 훼손되었다. 사고 원인과 향후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고, 고객 상담 창구는 획일적인 답변만을 반복했다. 수많은 고객이 ‘나만 소외된 건 아닌가’라는 불신을 품으며 기업이 보여 준 보상과 소통이 충분히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Apple은 Apple Security Bounty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회복공정성의 모범을 보여준다. 화이트 햇 해커(White Hat Hacker) 커뮤니티를 공식 초청하여 자사 서비스와 시스템의 보안 취약점을 탐색하도록 격려한다. 연구자는 프로덕션 서버나 하드웨어에 직접 접근하는 대신 Virtual Research Environment(VRE)와 Security Research Device를 통해서만 테스트를 수행하도록 엄격히 통제된다. 보고된 취약점의 종류와 심각도에 따라 100달러에서 100만 달러까지 보상금을 지급해 분배공정성을 확보하며, Bugreporter 포털에 테스트 범위, 금지 대상, 보고 절차, 보상 기준을 명확히 게시해 절차공정성을 높인다. 제출된 보고서마다 보안팀이 직접 피드백을 제공하고 복구 완료 후 연구자 전원에게 감사 이메일과 설문을 발송해 상호작용공정성을 강화한다.

회복공정성의 결여는 민간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얼마 전 감사원이 발표한 전정부의 국가통계 조작 의혹은 공공 영역이 어떻게 신뢰를 좌초시키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통계 조작은 시장 예측을 왜곡하고 소비자물가 지표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며 금리 변동성을 심화시킨다. 국민에게 제공돼야 할 객관적 통계가 특정 목적을 위해 왜곡되었을 때 단순한 해명이나 사과만으로는 신뢰를 되살리기 어렵다. 왜곡된 데이터를 바로잡고 재발 방지 대책을 명확히 제시하며 향후 통계 작성·검증 과정을 독립된 기관이 투명하게 감독하겠다는 구체적 보증이 있어야만 절차공정성과 분배공정성이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

이제 공정성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 세대는 대학 입시·군 복무·취업 등 중요한 삶의 관문마다 공정한 기회를 최소한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 이 기준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합리적 설명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와 불신으로 반응한다. ‘아빠 찬스’ 논란에서 보듯, 공정 경쟁에 대한 기대가 한 번 흔들리면 사회 전체의 응집력은 급격히 약화된다.

공정성에 대한 민감도은 단순한 감정 문제가 아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정책은 설득력을 잃고 제도는 정당성을 상실한다. 유능한 기업이라도 공정성 문제로 신뢰를 잃으면 고객의 선택에서 멀어지며, 행정기관이라도 공정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민원의 골칫거리와 사회적 비용만 쌓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패 예방을 위한 기술적 보강만큼이나 실패 이후의 회복 과정을 설계하는 데도 집중해야 한다. 공공기관이라면 외부 전문가와 시민 대표로 구성된 ‘투명성 위원회’를 설립해 사고 대응 프로세스를 사전에 점검하고 결정 과정을 공개해야 한다. 기업이라면 블록체인 기반의 대응 로그 시스템을 도입해 보상과 절차가 실시간으로 기록·공유되도록 하면 절차공정성을 높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움직인다. 실패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지만 회복력 있는 사회는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그 회복력의 핵심에는 공정성이 자리한다. 공정하게 회복하는 시스템은 조직이 맞닥뜨린 위기를 다음 성공의 디딤돌로 바꾸고 사회 전체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를 단순히 넘기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실패 이후를 준비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이며 그 실력은 공정한 회복 과정을 통해 비로소 증명된다.

이상윤 인하대학교 아태물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