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웅칼럼] 명군(明君)이 암군(暗君)으로
김부식 선생의 삼국사기에 효행의 본을 보인 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제 본기 제6에 "의자왕(義慈王 ?~660)은 무왕(武王 581이전~641)의 원자(元子)로 담이 크고 결단성이 있었다. 왕은 무왕 재위 33년(632년)에 태자를 삼았는데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로써 지내므로, 그때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이름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서(641년)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의자왕은 지방을 순시하면서 죽어마땅한 중죄인이 아니면 모두 사면 석방하였습니다.
그리고 642년 7월에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8월에는 윤충 장군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고 신라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여 성주 품석을 항복시키면서 품석과 그 가족을 모두 죽여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지방에 분산 거주케하고 군사들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어 당나라와 고구려와 화친하면서, 신라의 당항성(지금의 남양)을 공격하여 취하였습니다. 의자왕은 다시 신라를 공격하여 10여 성을 취하려는 전쟁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에게 패하면서 백제의 형편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후 당나라와 고구려, 신라의 관계가 복잡하여지고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면서 삼국의 지형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신라, 고구려, 백제는 솥발처럼 정립(鼎立)된 듯하나, 651년 당나라 고종이 백제 의자왕에게 보낸 글을 보면 "해동의 삼국이 건국한지 오래고 강토의 경계를 벌려 견아(犬牙, 개의 이빨)처럼 경계가 일직선이 되지 못하고 들쭉날쭉 서로 어긋나서 근대 이래로 틈을 만들어 서로 싸움을 일으켜 평안한 세월이 거의 없고 삼한의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을 칼도마에 걸고 무기를 쌓게 하는 마음을 일으킴이 밤낮으로 계속되어 짐을 천리(天理, 천지 자연의 이치)를 대신하고 만물을 다스리니 심히 민망하게 생각하오… -하략-"라고 했습니다.
당나라도 삼국의 분란으로 나라들이 편안한 날이 없었음을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틈에 의자왕은 655년 정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30개 성을 취하면서 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만의 뒤에는 향락이 따르고, 그 주변에는 충신의 탈을 쓴 간신들이 패망으로 가는 부채질을 하게 마련입니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의 상황에서 충신 좌평 성충(成忠, 605~656)이 목숨을 걸고 의자왕에게 나라를 바로 잡으라고 직언을 하였으나 왕은 성충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에서도 전쟁에 대비하라는 책략을 글로써 올렸으나 듣지않았고, 성충은 옥에서 굶어죽었습니다.
결국 660년 6월에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군사 13만 명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사 5만 명이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백제의 명장 계백(階伯 ?~660)은 결사용사 5천 명을 이끌고 신라군사와 싸웠습니다. 그는 "내 처자가 적에게 잡혀서 노비가 되어 그들에게 욕을 당하는것보다 차라리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하고 모두 자기 손으로 죽인 후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붙어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의 신라군에게 패배하며 장엄하게 전사하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왕궁으로 밀려들자 왕은 탄식하기를 "내가 성충의 충성된 말을 듣지 아니하여 이지경에 이르렀다"하며 도망하다가 붙잡혀 항복하였고 신라 무열왕과 당의 소정방에게 술잔을 따라올리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자와 대신과 장병 88명과 백성 1만2천807명을 당나라 낙양으로 잡아갔습니다.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한때 해동증자라며 명군의 자리에 있던 왕이 망국의 주범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명군(明君, 현명한 임금)은 충신의 충신됨을 알아보고 간신의 간신됨을 알아보는 혜안과 판단력이 있고 국태민안 부국강병의 길을 가는 왕이라면, 암군(暗君,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은 간신을 충신이라 중용하고, 충신을 간신이나 역신으로 배격하며, 백성들을 속이며 이용하고 도탄에 빠지게 하고 나라는 항상 불안하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며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왕인 것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화웅 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