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환칼럼] 전쟁은 잊혔지만, 총구는 살아있다
새 정부가 짚어야 할 평화의 과제
한 아이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가자지구 폐허 속 "엄마!"라는 외침이 뉴스 화면을 뚫고 나왔다. 나는 리모컨을 돌렸다. 다음 화면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나도 낄낄거렸다. 참혹은 몇 초였고, 현실은 예능이 되었다. 세계는 다시 조용했다. 평화로웠다.
눈 속에 아들을 묻은 우크라이나의 한 어머니는 "조국을 위해 죽었다지만, 나는 그 전쟁에 동의한 적이 없다."며 통곡했다. 하지만 그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없다. 전쟁은 감정을 기록하지 않는다. 오직 파괴만 남긴다.
전쟁이란 행복, 사랑, 꿈을 파괴하는 무서운 폭력이다. 전쟁은 단순히 군사적 충돌을 넘어, 인간성마저 지워버린다. 희생자는 그냥 이름 없는 수치와 통계로 치환된다. 죽음의 의미는 누구도 헤아리지 않는다. 그 속에 감춰진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아이와 그 엄마의 울음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아니 계속되고 있다.
‘6.25 전쟁’은 먼 과거가 되었지만, 지금도 미묘한 긴장은 존재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평범한 주말이었을 그날은 한순간에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수백만의 사람이 그날 이후 죽거나 흩어졌고 모든 일상이 무너졌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대비하지 않은 결과였다.
지금, 그 전쟁은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 불린다. 세계도, 당사자인 우리도 잊었다.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인데도 말이다. 전쟁은 과거형이 되었고, 평화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 당연함을 믿는 사람들은 일부 청년 세대에 국한된 게 아니다. 정부, 정치권, 시민, 언론까지 포함 된다.
‘평화’를 말하는 정치인은 많다. 평화를 ‘쇼핑하듯’ 말하는 이들도 있다. 평화란 스마트워치처럼 장착하면 자동 작동하는 장비가 아니다.
불편한 진실은 이거다. 전쟁은 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온다. 상대가 먼저 오지 않도록, ‘치명적인 대가’를 상기시켜야 멈춘다. 그게 억지력이다.
그런데 우리의 군사 전략은 정권에 따라 바뀌고, 외교 정책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평화를 말하며 안보를 흔들고, 협력을 말하며 동맹을 외면한다. 도대체 평화를 지키려 하긴 하는 건가?
이스라엘은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는가? 군비만이 아니다. 상대에게 ‘우리를 건드리면 너희도 끝’이라는 응징의 힘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는 그 신호를 너무 늦게 보냈다. 그리고 무너졌다.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전쟁 방지의 실질적 준비다.
북한의 핵과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대한 총체적 대응체계인 한국형 3축체계, 즉 ‘Kill Chain(타격순환체계)’, ‘KAMD(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 ‘KAPR(대량응징보복)’은 장식이 아니다. 책상 위 PPT용이 아니라, 실제 작동하는 억지력이 되어야 한다. 사이버·우주 공간의 안보 역량도 더는 유예할 수 없다.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둘째, 동맹은 말보다 신뢰다.
한미동맹은 쇼윈도 관계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감정에 머무를 것인가? 전략으로 나아갈 것인가? 북한이 도발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과거사 논쟁에 빠져 있다.
전쟁은 외교의 마지막 단계다. 전쟁 억지력은 외교 테이블에서 발휘된다.
셋째, 안보의 주체는 국민이다.
전쟁은 군인이 막지만, 평화는 시민이 지킨다. 청년 세대가 전쟁을 체감하지 못한다면 먼저 알려줘야 한다. ‘전쟁은 옛날이야기’라는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세대는 교과서가 아닌 현실에서 전쟁을 배울지도 모른다.
넷째, 국제사회에 중립이란 없다. 당당한 평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미·중, 미·러 등의 갈등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며 멈춰 서 있는 건, 외교가 아니라 방관이다. 유엔, 아세안, 국제사회와 연대하며 우리가 설 자리, 말할 말을 찾아야 한다. 당당한 ‘주체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낭만적 전쟁은 없다. 거저 얻는 평화도 없다. 전쟁을 잊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준비하지 않으면, 이 땅의 누군가가 뉴스 속에서 울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 평화는 본디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6.25전쟁 75주년을 맞아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정상환 The Brain & Action Communicator, 한경국립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