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의 생애와 독립운동

2025-07-03     성주현
윤희순 초상화.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과 뜻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항일의 길을 걸으며 무장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윤희순(尹熙順)이다. 그녀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제약되던 시대에 당당히 무장투쟁과 교육활동에 참여하며, 한국 여성독립운동사의 새 장을 열었다.
 

◇생애와 성장 배경 = 윤희순은 1860년 7월 28일, 경기도 양주군 구지면(현 구리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집안은 비교적 유복한 양반 가문이었다. 조부 윤기성은 황해관찰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윤익상과 어머니 덕수장씨의 큰딸이다. 윤희순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교육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 그녀는 성품이 활발하고 씩씩하며 충효 사상이 투철해 시부를 정성껏 봉양하고 가사를 처리하는데 모범이었으며, 집안의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해서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16세 되던 1875년 집안과 교류가 있던 춘천의 유제원과 결혼했다. 유제원은 춘천의병장으로 유명한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식의 조카였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중악, 유중락 등 춘천지역 유림 세력과 함께 이소응 의병진과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유학자의 딸로 태어나 의병장의 며느리가 된 윤희순은 자연스럽게 애국심을 키웠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활동이 제약받는 현실을 직접 돌파했다. 강화도조약 이후 을미사변과 단발령, 그리고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윤희순은 민족의식을 갖고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다.

윤희순 묘소. 사진=한국문화원연합회

◇여성 독립운동의 선구자, 여성의병부대 조직 = 윤희순의 독립운동은 1907년부터 본격화된다. 그녀는 남성과 함께 싸우는 것을 넘어, 여성도 항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나라를 구하는 데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라는 그녀의 인식은 독립운동의 첫걸음이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전개되자 윤희순은 의병 활동을 하는 그들에게 뒷바라지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을 부녀자와 협력해 의병에게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윤희순은 의병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당시 시대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여성의 역할은 가사와 육아에 한정돼 있었고,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윤희순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 무장을 하고 의병 부대를 조직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은 국내 최초의 여성 의병 조직인 ‘안사람 의병단’을 결성한 것이다.

안사람 의병단은 춘천지역 여성 30여 명으로 조직했는데, 화서학파 유생의 부인과 선비의 부인들이 참가했다. 윤희순이 조직한 의병단은 여성들도 무기를 다루고 싸울 수 있도록 교육했다. 남성과 다름없이 무기 및 탄약제조 및 공급, 군수품 전달, 의병 연락 활동,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군사훈련에도 직접 참여했다.

윤희순은 의병진의 후방 지원뿐 아니라,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며 병사들을 치료하고 피난을 돕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전반을 이끌었다. 윤희순의 의병 활동은 시대적 상황과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여성들도 얼마든지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 참여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위치한 윤희순 어록비(의병가비). 사진=성주현

◇항일 시가(詩歌) 지어 민족의식 고취 = 윤희순의 독립운동은 단지 의병투쟁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의병 가사를 제작하고 대중에게 배포해 의병 활동을 참여를 독려했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를 비롯해 ‘의병군가’, ‘왜놈 대장 보거라’, ‘오랑캐들아 경고한다’ 등 16편의 가사를 지었다. 이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중 ‘왜놈 대장 보거라’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 우리나라 사람 이용하여 우리나라 임금님을 괴롭히며 우리나라를 너희 놈들이 무슨 일로 통치를 한단 말이냐. … (중략) … 절대로 우리 임금님을 괴롭히지 말라. 만약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네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 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이 오랑캐야 … (중략)…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그녀는 ‘시문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내용,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심판하자’는 강한 의지를 담은 노래들은 민중 사이에서 널리 불리며 항일 정서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시문은 단순한 감성 표현이 아닌, 민중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무기였다. 윤희순은 이를 통해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며 정신적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당시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구술 문화와 노래는 민중 계몽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중국 요녕성(랴오닝성) 환인면에 위치한 노학당 기념비. 사진=독립기념관

◇만주 망명, 노학당 설립하고 교육 활동 전개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에 강점되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뒷따랐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망명했다. 이곳에 항일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윤희순도 강점 이후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 등 가족과 함께 일제에 강점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하고 망명을 결심했다. 윤희순은 1911년 가족 친지들과 함께 남만주 환인현으로 망명했다. 환인현은 한인사회가 형성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곳에서 그녀는 교육운동에 주력했다.

윤희순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환인현 남괴마자에 동창교의 분교로 노학당(老學堂)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은 교장을 맡았다. 그녀가 노학당을 설립한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응할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학당은 문화 지식이 있고 애국정신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수 있는 ‘항일인재의 양성’에 뒀고, 학교가 추구하는 정신은 ‘항일, 애국, 분발, 향상‘이었다. 노학당은 교실, 운동장, 식당, 기숙사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윤희순은 노학당에서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교육으로 50여 명의 항일인재를 배출, 이들은 독립운동에서 핵심인물로 활약하며 항일정신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지만 노학당은 중일 간의 외교 갈등과 일본의 정치 간섭 강화, 한인 사립학교에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1915년에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윤희순의 ‘안사람 의병가’. 사진=국가보훈부

◇아들과 함께 무장투쟁에 참여 = 노학당 폐교를 계기로 윤희순은 무장투쟁에도 적극 참여했다. 당시 아들 유상돈은 만주와 연해주, 간도지역 일대에 흩어진 의병운동의 주역으로 활동 중이었다. 후손들과 문인들을 규합해 조선독립단을 조직, 의병 정신을 재창출하고 재통합하는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무장투쟁으로 활동 확대해 나갔다. 윤희순은 아들 유돈상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으며,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 사병을 피신시켜 독립군에 인도했다. 윤희순은 항일투쟁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항일연합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저는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천 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 우리가 중국에 온 것은 일본 놈들한테 빼앗긴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한중 두 나라 백성들의 공동원수입니다. 우리 두 민족은 두 손을 잡고 같이 일본제국주의와 싸웁시다"라고 연설했다.

망명지에서도 그녀는 ‘부녀자’의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독립군을 조직하고 후방을 지원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금 부족과 배고픔 속에 어려움을 겪을 때, 그녀는 자금을 모으고 의복과 식량을 조달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여성의 섬세함과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조직의 결속력을 다졌다.

윤희순은 만주에서 말년을 보내며 조국 독립을 염원하다 1935년 8월 1일, 지린성에서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만주 해성현 묘관둔(苗官屯) 북산(北山)에 안장됐다. 1994년 고국으로 봉환돼 강원도 도민장으로 춘천 남면 관천리 선영에 안장됐으며, 1983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됐다가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승격됐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오늘, 그녀의 삶과 독립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