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수 칼럼] 피아노 치는 여자
예술과 억압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피아노 치는 여자’(Die Klavierspielerin)는 억압과 권력, 성과 예술, 자유와 굴종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통해, 인간 심리의 균열과 사회 구조의 모순을 파헤친다. 이 작품의 본질은 한 여성의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가정, 비틀린 권력관계를 내면화한 사회, 감정과 욕망을 왜곡한 문화를 고발한다. 미카엘 하네케가 감독한 동명 영화에서는,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압권이다. 주인공 에리카의 내면을 냉정하게 표현하며, 억압된 욕망과 감정의 파국을 연기한다.
에리카는 비인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중년의 여교수다. 고상하고 엄격한 음악 교육자로 보이지만, 사생활은 병리적 충동과 억압된 성적 환상으로 뒤엉켜 있다. 그녀는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어머니와 함께 산다. 피아노는 모녀 사이의 유일한 소통 도구이자, 통제 수단이다. 어머니는 에리카의 재능을 성과주의적 예술로 전락시키고, 에리카는 예술의 고통을 감정 해방이 아닌 억압의 심화로 체험한다.
억압의 재생산과 자기파괴
에리카는 사회적 권력 구조에 의해 정해진 성역할과 여성성의 폭력적 내면화를 드러낸다. 그녀의 충동은 사회적 억압으로 왜곡된 여성 욕망의 일그러진 표정이다. 에리카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자율성을 갖지 못하고, 사랑을 원하면서도 지배와 굴복의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는다. 그녀의 내면은 욕망과 억압, 통제와 파괴로 끝없이 소모된다.
제자 클레멘트는 당당한 남성으로 등장하지만, 에리카의 성적 스크립트 안에서 감정과 권력을 뒤틀린 방식으로 경험한다. 에리카는 클레멘트에게 복종과 학대를 동시에 요구하며, 자신이 받아온 억압의 방식을 재현한다.
에리카는 내면의 갈등을 자각하고도 변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억압의 방식을 복제하며 타인에게 전이했다. 제자와의 관계를 자기 방식대로 통제하려 했고, 어머니와 사회가 자신에게 가했던 방식을 그대로 반복했다. 이는 그녀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이중 구조를 보여준다. 의식은 외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 조건을 성찰하고 넘어서려는 노력 없이 머무를 때, 책임은 개인에게 귀속된다.
진상규명과 자리매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좌초와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의 실패로, 한국 현대사는 거친 굴곡을 남겼다. 가해자가 면죄부를 받았고, 피해자는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진실을 캐묻지 않는 체제로 굳어진 결과, 사회는 대가를 다시 치러야 했다.
지난 겨울 우리가 겪은 위기는 한 개인의 광기로만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계엄, 내란, 체포, 감금, 석방, 습격, 파면과 같은 음습한 용어가 장악했던 변란의 과정에서 국민은 사법 체계의 견고하지 못함과 공교육의 도덕적 허약함을 보았다. 역사적 심판의 실패와 유예가 윤리적 무감각을 키웠다. 에리카와 변란 주동자의 공통점은 건강한 교육, 감정 훈련, 자기성찰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에게 최고 권력을 위임했던 사회는 더 큰 책임을 절감해야 한다.
민주 시민 교육
국정 책임자의 일탈은 공교육 시스템의 실패이자, 사회 전체의 윤리적 부주의의 결과였다. 국민이 합의한 헌법의 가치를 거리낌 없이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한 인물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공화제 윤리’를 실천하도록 가르치지 못한 교육의 결핍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곧, 공교육이 시민성을 어떻게 외면하고 경시해왔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욕망을 정당화한 정치구조, 판단을 방해한 이념 논쟁, 책임을 가르치지 못한 교육 시스템에서 이미 구조적 파국은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비판적 사고, 권력에 대한 견제, 타인의 권리와 공동체 규범을 배울 선진 교육이 절실해졌다. 교육 운동 시민단체 ‘학교시민교육 교원노조’의 주장처럼, ‘민주시민교육’을 필수 교과로 교육과정에 두는 것을 국정과제로 검토해야 한다. 사회 문제를 분석하고, 사회적 책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복종보다 질문을, 암기보다 판단을 가르치는 교육만이 단단한 시민공화국의 기초가 된다. 작가 옐리네크는 에리카의 질서 없는 삶을 음악에 은유하여 정의했다. "그녀의 인생은 박자가 맞지 않는 연습곡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혼란과 불협화음의 반복이었다."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