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은둔 청년 방문을 열다] '일상'이 낯설던 청년들, 다시 일상을 배우다
②조심스럽게 다시 여는 일상
고립·은둔청년(이하 위기청년)의 자립이행은 ‘재고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에 조력자가 없는 위기청년들은 지원사업이 중단되면 기존 생활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많은 공공·민간 지원사업들이 초기발굴과 상담에 집중하거나, 앞 단계를 건너뛰고 취업 연계에만 집중해 부작용을 겪었다.
위기청년들에게는 이렇듯 분절된 단기간의 지원이 아닌, 고립에서 벗어나 관계를 맺고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찾아가는 단계를 지켜보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중부일보는 긴 호흡으로 자립을 향해 나아가는 위기청년들의 곁에서 이들의 변화과정을 함께 하고자 한다.
지난 16일 오후 2시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일하는학교’ 교실에 ‘모멘텀’ 참가자 10명이 모였다. 그동안 진행된 진로설계 프로그램 발표회를 갖기 위해서다. 이날 자리한 참가자 모두는 일하는 학교와 인연을 맺고 고립에서 벗어나, 자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청년들이다.
프로그램 시작 4주 차인 만큼 교실에는 새로운 분위기가 감지됐다. 흔히 고립·은둔 청년하면 떠오르는 음울하고 무기력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긴장감이 감돌고 얼어붙은 분위기를 예상했지만, 그간의 만남과 훈련을 통해 서로를 향한 신뢰와 유대감이 싹트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고, 일하는학교 선생님들에게 친근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1개월 만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앞서 참여 청년들은 서로를 알아가는 기회를 가지며 3주에 걸쳐 유대감을 쌓아왔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짚어보고, 프로그램 참여 동기, 실천이 어려운 이유, 시도해본 목표 등을 서로 공유하며 관계를 형성했다. 다른 사람과 인사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청년인 점을 고려해 게임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강사의 지도에 따라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는 실습도 거쳤다.
진로설계 프로그램 마지막 날, 서로 마주보며 책상에 앉은 이들은 각자 원하는 도화지를 골라 로드맵을 작성했다. 주제는 ‘그래도 챌린지’. 이는 어떤 계획이나 목표를 세워도 괜찮다는 것. 자신의 템포에 맞춰 자유롭게 만들어 가라는 의도를 담았다. 방식은 먼저 큰 목표를 잡고 3개월, 일주일씩 계획을 세우는 식으로 이뤄졌으며, 재촉하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진행됐다.
청년들은 준비된 스티커, 색연필 등으로 로드맵을 꾸민 후 비전보드를 모두에게 내보였다. 한 명씩 발표가 끝나면 박수가 나왔다. 응원의 말과 조언도 오갔다.
일하는학교 모인 '모멘텀' 참가자들
프로그램 4주차만에 작은 변화 시작
서로를 향한 신뢰·유대감 생겨나고
흰 도화지엔 진로 로드맵도 그려내
"저는 무언가를 끈기 있게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불규칙한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이러다 보니 자신감, 자존감은 바닥을 쳤죠. 저도 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프로그램에 참가했고,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 샤워를 하고, 야채 들어간 음식을 먹고, 12시 전에 핸드폰을 끄고 잠을 자려고 합니다."(김윤재(가명), 31세)
"저는 체중을 늘리고, 문화센터에 다니며 취미생활을 하고 싶습니다."(김선우(가명), 27세)
이들이 작성한 계획표에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씻기, 물 한 컵 마시기, 500보 이상 걷기 등 소소하지만 평범한 일들이 전부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수 있는 큰 결심인 것이다.
이정현 일하는학교 이사장은 "진로설계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취업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다"라며 "무기력에 빠진 이들에게 책 읽기, 잠자기 등 실현 가능한 작은 변화를 시도하고, 이를 통해 성취 경험을 쌓게 해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시설에 입소한 이주연(가명, 27세)씨는 1년 이상 고립상태에 놓여있었다. 1인 가구로 생활하다 보니 의지할만한 관계도 없었다. 기초적인 생활패턴이 무너지고 생계를 위협받는 상황까지 처했었다.
이영미(가명, 35세)씨는 "의미와 성취감을 느낄 만한 일상활동이 없었고 장기화 되면서 우울과 무기력이 심화됐다"며 "뭔가 경험을 해야한다는 건 알지만 그럴 만한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주원(가명, 30세)씨 역시 "나에게 맞는 일상생활을 함께 고민하고, 지지해줄 곳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체중 늘리고… 씻고… 물 마시기까지
그들에겐 그 어떤 것보다 큰 목표
작은 변화를 통한 '성취경험' 효과
경기복지재단이 발행한 ‘2024 경기도 고립·은둔 천년 실태조사’에도 이 같은 고립 상태에서의 탈출 욕구와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사에 따르면 본인의 고립·은둔에서 벗어나고 싶은 청년들은 64.2%로 나타났다. 고립·은둔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해보거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청년은 39.0%였다. 시도를 해보지 않거나 도움을 받은 적 없는 이유로는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해서’가 가장 많았다. 주된 이유로는 ‘돈이나 시간 등이 부족해서’,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아서’ 등을 꼽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모멘텀’ 참가자 중에도 밤낮이 바뀌거나 샤워·양치 등을 하지 않고 밥을 먹지 않고 생활하는 청년이 존재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고립에 빠지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마저도 상실한 것이다.
1개월 간 프로그램을 진행한 ‘모멘텀’ 참가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환기하기’, ‘청결 관리하기’ 등 소소한 목표를 이뤄가며 무너진 일상 루틴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임지원(가명, 25)씨는 "계속해서 재고립에 빠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데 진로계발 활동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니 울적한 기분이 줄어들고 뭔가를 하고 싶은 의지가 아주 조금이지만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강은진(가명, 27)씨도 "사람을 만나지 않고 오랜 기간 사회관계가 없어 심적으로 정말 많이 힘들었다"며 "또래 친구들도 만날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생긴 것 같아 좋다"고 전했다.
이정현 일하는학교 이사장은 "일하는학교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참여 청년들을 지원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라며 "이를 통해 효능감과 사회적 지지인식이 높아지고 자기계발 목표달성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고 설명한다.
진로설계를 마친 모멘텀 청년들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기 위해 주 1회씩 운동모임을 시작했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들의 작은 움직임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따라간다.
강찬구·김민아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