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택칼럼] 라 베르나(La Verna)
휴가철이 되면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피서를 떠난다. 그에 못지않게 많은 이가 산중의 사찰을 찾기도 한다. 천주교 사제인 필자도 절에 가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거룩한 곳을 찾아가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기도를 드리며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다.
가톨릭 교회는 2025년을 ‘희년’으로 지정하여 특별한 해로 지내고 있는데, 필자는 지난 1월 순례단을 꾸려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밀라노에서 출발하여 파도바, 아씨시, 피렌체 등을 거쳐 로마에서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그중 ‘라 베르나’라는 곳이 기억에 남는데,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곳으로, 가톨릭 성인 중 한 분인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五傷)’을 받은 장소로 유명하다. 오상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다섯 상처 상처(두 손, 두 발, 가슴)를 뜻하는데,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통을 깊이 묵상하고 일치한 나머지 프란치스코 성인을 비롯한 몇몇 성인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똑같이 입고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나서, 함께 갔던 순례자들과 재모임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문득 수년 전에 피정을 했던 ‘라 베르나 기도의 집’이 떠올랐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가 운영하는 피정의 집으로, 블로그나 유튜브를 통해서도 홍보가 잘 되어 있고, ‘템플 스테이’처럼 일반인에게도 열려 있어 조용한 가운데 쉼과 휴식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룩한 장소다. 평창의 산 속에 위치한 곳이라 여름에도 그리 덥지 않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기리는 곳이라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재모임 장소로 정했다. 순례 영상을 시청하고 순례 이후 삶의 나눔 등을 통해 연초에 있었던 순례의 감동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모임에서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것은, 자연 속에 머물며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충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상의 근심, 고민거리 등에서 벗어나,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나의 영혼과 육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며, 순례의 감동을 공유하는 분들과 함께 마음 속 이야기를 서로 듣고 나누며 공감할 수 있었다. 휴가철에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거룩한 곳을 찾아 조용하고 차분한 가운데 영혼의 상처와 아픔을 돌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묻는다. 어떻게 해야 진정한 쉼이 될까? 쉼이란 무거운 일상의 짐을 내려놓고 지친 심신의 휴식을 취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침묵이 중요하다. 마음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것을 꺼내놓을 때 나의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이 굴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치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 피정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며 얻은 가장 큰 보람은 그동안 내 안에 얼마나 많은 기름기가 끼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정신과 마음을 비우는 과정에서, 세속에서 묻었던 기름때가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몸에서도 기름이 빠지고 건강을 되찾는 느낌을 받는다.
피정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선물처럼 나타난 반딧불들의 ‘공연’도 구경할 수 있었고, 모처럼 맑게 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축제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다. 무엇보다 기름기 빠진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방에는 읽지 않는 책, 필요 없는 물건으로 가득하다. 그동안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찔하기만 하다. 그동안 빈 공간 없이 살아온 나의 삶에 여백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기름기 없는 음식, 기름기 없는 생활을 통해 나의 삶을 간소하고 소박하게 만들다보면, 예전보다는 가볍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가볍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