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수칼럼] 벤자민 버튼과 슈톡하우젠의 시간
시간은 과연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흐를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무게가 점점 달라진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심리학자 폴 자네(Paul Jané)는 이러한 느낌이 실제 심리적 현상임을 밝혔다. 이른바 ‘자네의 법칙’에 따르면, 1세는 365일, 20세는 18.3일, 40세는 9.1일, 50세는 7.3일, 80세는 4.6일처럼 나이에 따라 일 년의 시간을 다르게 체감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자극과 경험이 줄고,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면 정보 처리 속도가 둔화하여, 고령자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다고 느낀다. 더구나 도파민 분비의 감소로 인해 기억력이 감퇴하면서, 뇌는 기억의 지점을 성기게 생성한다. 여기에 멜라토닌의 불균형으로 인한 수면 패턴의 흔들림까지 더해져, 시간에 대한 감각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는 프랜시스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시간의 가역성과 비가역성을 주제로 한 독특한 이야기를 펼친다. 주인공 벤자민은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 점차 젊어지는, 역행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이 영화는 인간이 경험하는 전형적인 비가역적 시간 질서를 전복하며, ‘가역적인 시간’이라는 상상적 조건을 실험한다.
벤자민의 육체는 젊어지지만, 그도 결국 죽음을 향한 또 다른 비가역적 궤도를 따른다. 이 역행적 생애는 시간 속에 포획된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는 강력한 은유이자, 삶의 시간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그의 삶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ㆍ인문학적 문제를 드러낸다. 낯선 시간의 흐름을 사는 존재가 겪는 고립감과 상실감은, 정체성이 사회적 연대와 시간 경험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형되는지를 고찰하게 만든다.
독일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의 ‘차이트마쎄’(시간 덩어리, 1955~1956)는 다섯 개의 목관악기를 위한 곡으로, 시간의 다층적 구조를 음악적으로 탐구한 작품이다. 그는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속도와 리듬을 통해 시간의 질량과 상대적 감각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시간의 비가역성과 가역성을 동시에 품으며, 시간 개념의 절대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예술성을 모색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시간척도’는 일관된 시간 구조를 따르기보다, 다양한 시간 층위가 동시에 공존하도록 구성하는 방식이다. 12단계의 서로 다른 메트로놈 속도와 연주자의 자율 속도를 혼합함으로써, 시간 구성의 유연성과 주체성이 발생한다. 또한 ‘폴리템포’는 다섯 개의 독립된 템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 구조를 말한다. 가령, 한 악기는 빠르게, 다른 악기는 느리게, 또 다른 악기는 느리다가 점차 빨라지는 흐름을 갖는다. 이러한 시간의 병렬적 흐름은 이전의 음악 논리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새로운 시간의 지각 조건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결국 소멸한다. 시간은 단지 물리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문화와 규범, 언어와 제도를 통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이처럼 사회가 형성한 시간 감각 속에서 살아가지만, 예술은 그 경계를 넘어선다. 예술은 비가역적인 시간 구조를 해체하며, 새로운 시간의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자네의 법칙’은 연령에 따른 시간 체감의 변화를 설명하지만, 사회적 변란 시기에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시간 왜곡이 발생한다. 지난 겨울, 우리는 시간의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듯한 감각을 공유했다. 계엄과 내란이 일상의 리듬을 파괴했고, 뇌는 평소보다 더 많은 기억의 지점을 생성했다. 그 결과, 짧은 기간임에도 시간은 비정상적으로 길게 느껴졌다.
반면에, 몰입과 즐거움 속의 시간은 찰나처럼 스쳐간다. 인간의 감각은 외부에 의해 강요된 타율적 시간과 스스로 선택한 자율적 시간의 길이를 전혀 다르게 체험한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을 속도와 밀도에서 심리적으로 다르게 인식함으로써,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석하고 구성하는 가변적 의미로 남는다.
슈톡하우젠의 음악과 벤자민 버튼의 삶은, 시간의 다차원성과 가능성에 대한 상상을 열어준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 각자는, 저마다 다른 시간의 리듬을 타고 살아간다. 결국 자기의 시간과 삶을 스스로 정의하고 설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자신의 상대적 시간을 자각하고, 외부 세계와 조율할 수 있는 창의적 상상력—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 감각이다.
주용수 한경국립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