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택칼럼] 울지 마라
요즘 주위에 돌아가신 분들이 많이 계시다. 100수를 누리신 분도 계시지만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한 사람도 있다. ‘태어나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참척(慘慽)’이라는 말이 있다.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참척을 겪는 부모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주위에서 참척의 아픔을 겪는 사람을 종종 본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파리 유학 중에 필자의 ‘부제서품식’(사제가 되기 전에 거치는 단계)이 있었는데, 부모님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많은 신자분들이 오셔서 서품식에 참석하셨다. 서품식이 끝나고 식사가 끝난 자리에서 어머니의 친구분께서 계단에 걸터 앉아 구슬피 울고 계셨다. 동생과 어려서부터 아주 친했던 친구의 어머니신데,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도 아드님을 잃고 슬픔 중에 살아오시다, 부제서품을 받는 필자를 보고 아드님 생각이 나셨던 모양이다. 조용히 다가가서 손을 잡아드렸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달랠 수나 있었을까. 사제가 되려는 꿈을 놓지 않고 군에 갔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생을 달리 한 동네 후배도 생각난다. 성당에서 후배의 어머니는 필자를 볼 때마다 눈시울을 적시신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분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부모님은 오직 자식 걱정만 하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지극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하며 모든 기대를 자식에게 거는데, 자식이 먼저 죽는다는 건,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고 희망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루카 복음에 보면 외아들을 잃고 장례를 치르는 여인이 등장한다.(루카 7,11-17 참조) 게다가 그는 남편을 여읜 여인이었다. 당시 남편을 잃은 여인의 삶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불안정하고 비참하였다. 게다가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그 슬픔과 괴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한다. 모든 정황을 알고 느끼셨던 쓰라린 아픔이었으리라. 예수님은 연민 가득한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며 그가 겪었을 고통을 헤아리고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 받으신다. 예수님의 그 가엾은 마음은 구약의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자애 가득한 마음’이다. 또한 그 마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 안에 새겨진 마음이기도 하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아들들이 아프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유, 가엾어라. 내가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실 때도 옆 사람들과 금세 친해지신 다음, 그들의 딱한 사정을 들으시고는 자연스럽게 내뱉으셨다. “아유, 가엾어라.”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인공지능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대치할 수도, 인간과 마음과 정감이 오가는 소통을 할 수도 없다. 의심이 든다면 인공지능에게 직접 물어보시라.
가여워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늘과 통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은 과부에게 말씀하신다. “울지 마라.” 이 말씀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애타게 바라는 말씀이 아닐까. 아들이나 딸을 잃은 부모뿐 아니라, 우리들 모두 여러 이유로 슬프고 힘든 마음을 안고 살고 있다. 깊은 상처를 입은 마음을 공감 받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아픔과 마음 속 고민까지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울지 마라”는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간에 용기와 지지가 되는 말씀이다. 그리고 건네는 “일어나라”는 말씀은,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도록 하는, 슬픔과 절망, 고통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말씀이다.
하늘과 통하는 가여워하는 마음, 그것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며, 베일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과 속사정을 읽을 수 있는 초월적인 눈이다. 예수님의 가여워하는 그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읽는 열쇠와도 같다. 베일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 삶의 적나라한 모습,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가엾은 마음으로 다가설 때, 보이지 않는 마음, 그들의 삶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손짓하시는 듯하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