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로 떠나는 성지순례] 가을 오는 길따라 동서고금 넘나드는 진리여행
⑫갈곡리 성당, 율곡 이이 유적
◇박해 피해 횡성서 파주까지
파주 갈곡리 성당을 찾은 날은 마침 미사가 있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늘 전통 목조건축을 찾아 다니는 필자에게 돌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 건축을 찾아나설 때는 마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파주 갈곡리 성당은 조선 말기에 공소로써 세워졌다. 공소는 사제가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순회하면서 미사를 드리는 교회를 말하며, 대체로 성당보다는 규모가 작고 외진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 약현성당의 두세(Doucet, Camille-Eugene) 신부가 1898년 이곳의 칠울공소에 와서 활동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칠울’이란 칡이 많이 나는 골이란 뜻으로 갈곡(葛谷)의 우리말 표현이다.
이곳에 살았던 카톨릭 신자들은 지금은 유명한 횡성 풍수원 성당이 있는 풍수원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19세기 말에 파주로 들어왔다가 1896년에 지금의 장소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의 흙이 옹기를 굽기에 좋아서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칠울공소는 지금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용인 고초골 공소처럼 한옥으로 된 교회였고,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신도 수도 늘어났으나 한국전쟁 중에 폭격으로 불에 탔다.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미 해병대의 에드워드 마티뉴 군종신부와 한국 해병대 김창석 타대오 군종신부에 의해 지금과 같은 석조건물로 재건됐다. 기본적인 형태는 조금 앞서 지어진 의정부성당을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2018년에는 공소에서 성당으로 승격돼 지금의 갈곡리 성당이 된 것이다.
◇한적한 전원마을에 울리는 종소리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소나기성 폭우가 쏟아졌는데, 미사가 끝날 때 쯤 되니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이윽고 햇살이 막 나오기 시작하자 미사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종탑에서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오랜만에 듣는 진짜 종소리였다.
절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가 바리톤이나 베이스라면, 성당의 종소리는 테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아침에 이렇게 도시의 성당들이 일제히 종을 울리는 합창을 들을 수 있고, 필자도 어렸을 때는 동네 교회와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랐지만, 지금은 동네 민원이 들어와 쉽게 종을 치지 못하는 것 같다. 갈곡리성당은 그야말로 한적한 전원 마을에 자리잡은 성당이고 주민들이 천주교인이어서 그런지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대로 종을 울리는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나고 안에 들어가 보니 중앙의 십자가 위 예수님의 조각이나 측면 벽에 걸려있는 예수님 일대기를 압축한 조각상들은 모두 추상미술작품이다. 바깥에도 예수님의 고난 장면을 추상적으로 만든 철제 조각들이 성당을 둘러싸고 배열돼 있어, 안팍이 모두 미술관 같다.
거기다 날이 개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색색이 밀려들자 더욱 명상하기 좋은 분위기가 됐다. 나무로 만든 절이나, 돌로 만든 성당이나 모두 잠시 쉴 생각을 하게 만들고, 명상을 하고 싶게 만드는 분위기는 공통적인 셈이다.
성당 바깥에는 남매이기도 했던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두 분은 이곳 갈곡리 천주교인 집안에서 자라 본격적으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 함경남도 덕원군에 있었던 베네딕토회 덕원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련하고 서품을 받아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1949년 공산당에 끌려가 이후 1950년에 순교했다. 두 남매 순교자의 부조상 위에 수도원 건축이 함께 부조로 표현돼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덕원수도원 건물이다. 특히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는 유창한 라틴어와 독일어 실력에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까지 능숙하게 다뤘고,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당시 베네딕토회에서 크게 주목하는 신부로 기록되고 있었는데,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의 각목에 맞아 순교하셨다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갈곡리 성당만 방문했지만, 이곳 파주를 비롯해 의정부, 남양주, 양주, 고양 일대에는 갈곡리 성당처럼 많은 사연을 가진 천주교 성당과 유적이 많아 이 일대를 돌아보는 순례 코스가 있다. 성당 안에는 갈곡리 성당 기념 스탬프가 있는데, 아마도 각각의 성지마다 이렇게 기념 스탬프가 마련돼 있는 것 같다.
둘러보기를 마치고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잠시 앉아 마음을 쉬고 나오면서 보니 성당 입구의 성수대 옆 항아리가 눈에 띈다. 옛 한옥 공소는 이제 서양식 석조건축으로 바뀌었지만, 아마도 숨어살던 천주교인들이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는 옹기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 전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뭉클했다. 성당 옆에는 아담한 카페가 있는데, 때로는 바리스타급 실력을 갖춘 신부님이 직접 커피를 내려주신다고 한다.
◇정원 같이 꾸며진 율곡 이이 유적으로
경기도 북부 카톨릭 성지 순례 대신 인근의 율곡 이이 유적으로 향했다.
보통 이율곡 유적이라고 하면 강릉의 오죽헌을 떠올리는데,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친정이고 율곡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율곡의 본가는 파주 파평면 율곡리에 있었다.
그는 한양에서 관직에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노년기 대부분을 파주에서 보냈다. 짐작하겠지만 이이의 호 율곡은 바로 이 지명에서 온 것이다. 율곡리는 이이 유적이 있는 법원리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임진강을 끼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도망가던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야했는데, 밤인데다 비까지 와서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마침 그때 임진강가에 이이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토론하던 화석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이 정자를 불태워 밤길을 밝힌 덕분에 무사히 임진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로 그 율곡리다.
이이 유적은 이이 집안의 묘소와 함께 그 옆에 광해군 때 율곡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자운서원을 포함한다. 신사임당의 묘소 역시 이 묘역 안에 함께 있다. 입장료 1천 원을 내고 안으로 들어서니 잘 가꾼 공원이 보인다. 나무들 아래 그림자를 따라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을 정원 같은 공간이다. 이 정원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자운서원이, 오른쪽으로는 이이의 집안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자운서원은 커다란 태극문양이 그려진 솟을대문을 지나면 박석으로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좌우에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입지재), 서재(수양재)가 보이고, 정면에는 계단을 올라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인 강인당이 보인다.
특히 이 강인당 좌우로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두 그루 서있는데, 수령이 400년이 넘은 보호수들이다. 말하자면 1615년 자운서원이 세워질 때부터 있었던 나무가 되겠다. 한 그루는 옆으로 퍼진 듯하고, 한 그루는 위로 솟은 듯한 것이 마치 일부러 짝은 맞춘 듯 그렇게 서있다. 원래 중국 공자의 사당에도 큰 두 그루의 측백나무가 상징처럼 서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성균관이나 서원에도 두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경우가 많았다. 측백나무일 수도 있고, 주로 은행나무가 많은 편인데, 자운서원은 이처럼 느티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강인당 위로 다시 솟을대문을 지나면 다시금 계단을 올라 그 끝에 율곡의 위패를 모신 문성사 사당에 이른다. 강당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면, 이 사당 앞에는 향나무를 심었다. 향을 피우지 않더라도 이 향나무 덕분에 늘 향을 피운 셈이 되는 것일까?
사당 안에는 정면에 율곡 이이의 초상화가 걸렸고, 그 옆으로도 각각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향우측에 보이는 분이 사계 김장생, 향좌측에 보이는 분은 남계 박세채다. 김장생은 이이의 제자였고, 박세채는 다시 김장생에게 배운 바가 있었으며, 박세채는 특히 이이가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적극 지지하고 추진했던 인물이다.
이이는 우계 성혼과 함께 경기도에 속한 파주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기호학파로 불린다. 그런 이이를 문묘에 배향하려고 하자 사상적으로 다른 학파인 영남학파에서 반대가 심했던 것 같은데,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해 이이의 위상을 알렸던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결국 이이와 성혼은 숙종 때인 1681년에 동국 18현으로서 문묘에 배향됐다. 참고로 이이 유적 인근에는 이이의 벗이자 동지였던 성혼을 배향하는 파산서원 및 그의 무덤도 있으므로 한번 들려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사당 옆에는 마치 주방시설 같은 돌판이 있는데, 관세위라 쓰여있다. 솥뚜껑 같은 것 아래로는 홈이 파여 있어 물을 담아두는데, 제관들이 여기서 손을 씻은 곳이라 한다. 갈곡리성당에서 본 성수반과 율곡 사당에서 본 관세위는 동·서양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생각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동서고금 넘나든 파주 여행
이제 이이 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묘역 입구에는 여견문(如見門)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마치 이 문에 들어서 무덤 앞에 서거든 마치 이분들을 ‘살아생전에 뵙듯이 대하라’라고 알려주는 것 같다.
묘역 안으로는 더 울창한 숲이 펼쳐지고 언덕 아래에서부터 이이의 아들 이경림의 무덤이 있는데, 원래 부인 노씨 사이에서는 딸 하나만 있었고 그마나 일찍 죽어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서자였던 이경림이 대를 잇게 된 것이다.
그 위에는 부모의 묘역이 자리잡고 있는데, 신사임당의 무덤도 당연히 여기에 합장돼 있다. 어머니가 너무 유명하다 보니 아버지는 거의 아무도 모르는데, 참고로 이원수라는 분이다. 과거에 급제하지도, 딱히 벼슬길에서 출세한 것도 아니지만, 아내 신사임당을 지극히 사랑했고, 풍류를 즐기며 속 편하게 인생을 즐기며 산 순박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더 유명한 이유는 이이가 주로 어머니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만 남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안을 건사한 것도 어머니 사임당이었는데, 너무 과로했던 탓인지 신사임당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을 사랑했던 이원수였지만, 금새 새로 젊은 주막집 여인을 첩으로 들였는데, 이것이 싫었던 이이는 금강산에 들어가 출가한 적이 있었다. 불교를 공부하는 필자에게 조선의 많은 선비들 중에서 특히 이이에 관심이 많은 것도 바로 그와 불교와의 이런 인연 때문이기도 하다.
사임당 묘소 위에는 장남이자 이이의 형인 이선의 무덤이 있다. 이이는 셋째였는데, 형과 동생들은 그다지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는지 이선은 41세가 돼서야 겨우 생원시에 합격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 위에 이이 부부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데, 부모와 달리 합장묘가 아니라 위아래로 따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이이가 죽은 후 부인 노씨는 가족 묘역을 지키다가 하녀와 함께 왜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난이 끝나고 사람들이 이이의 무덤에 합장을 해주려고 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 누가 부인이고 누가 하녀인지 구분을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이이 무덤 위에 두 여인의 합장묘를 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족사를 훑고 나니 율곡 선생을 실제로 뵙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갈곡리 성당의 천주교, 자운서원의 성리학, 그리고 율곡이 관심을 가졌던 불교까지 이번 파주 여행은 동서와 고금을 넘나드는 여행이 됐다.
주수완 우석대학교 경영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