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7천 승려 일어나라"… 의용승군으로 독립 꿈꾼 불교 청년
⑨용주사 승려 신상완과 불교계의 독립운동
◇용주사의 촉망받는 승려, 신상완
신상완(申尙玩, 1891~1951)은 용주사 승려로 3.1운동 당시 중앙학림 학생들을 이끌고 탑골공원의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전장춘(田長春)·전장균(田章均)·이춘곡(李春谷)·김유원(金裕元)·김자만(金子萬) 등의 다양한 가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불교계를 대표하며 독립운동선상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용주사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 이후 장조)의 명복을 빌기 위한 능침사찰이었다. 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한 중창 이래 왕실의 지극한 보살핌과 최고의 사격(寺格)을 인정받아왔다. 용주사는 정조 당대부터 임금이 화산으로 원행을 할 경우 용주사 총섭은 예에 따라 대황교(大皇橋)에 군막(軍幕)을 설치하고 하사받은 별군장 복장을 입고 말을 타고 도열해 임금을 맞이했다.
정조 이래 조선후기 모든 국왕이 융·건릉을 참배했다. 순종 황제는 1908년 10월 기차를 타고 오는 능행을 한 이래 1913년 11월 능행과 1914년 9월 19일 융건릉 참배 때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은 순종황제를 배알했고, 황제는 특별히 포도주 2병을 하사하기도 했다.
1914년 용주사에는 젊고 능력있는 승려 신상완이 있었다. 1916년 매일신보에는 서화가 지창한(池昌翰)이 신상완을 상찬하는 시를 발표했는데, 사람됨이 자못 씩씩함을 찬탄하고 있다. 1917년 용주사 법계시험에서 중덕(中德)이 되었고, 용주사 말사였던 평안북도 의주군와 철산군의 국청사, 영장사, 천왕사, 나한사 등 작은 사찰의 주지를 역임했다. 신상완은 용주사를 대표해 서울 중앙학림에 다니는 엘리트 승려였다.
◇불교계의 독립운동
불교계 승려들의 독립운동은 주목의 대상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한용운(韓龍雲, 1879~1944)과 백용성(白龍城, 1863~1940) 스님과 진관사 태극기와 연관된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이 대표적이다.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로 활동한 월정사 출신 송세호(宋世浩) 스님과 해인사 출신 김봉률(金奉律, 1897~1949)·강재호(姜在鎬)와 대둔사 출신 박영희 등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독립군에 편성돼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봉선사 출신 이운허(李耘虛, 1892~1980)와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은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조선혁명당 및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했다.
또한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펼쳤던 사찰들로는 해인사, 통도사, 표충사, 김룡사를 비롯해 경기도의 봉선사, 신륵사 등의 만세시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용주사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사찰로 취급됐다. 주지 강대련 스님이 대표적 권승이자 친일승려로 알려졌던 탓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제자 신상완은 용주사 출신 승려로 독립운동을 펼친 대표적 인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불교계 3.1운동의 중심인물, 신상완
1915년 설립된 불교계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중앙학림에 재학 중이던 신상완은 학생 대표로 활동했다. 1919년 2월 28일 밤 만해 한용운은 유심회 회원들을 자택으로 긴급 소집했다. 3.1운동의 거대한 시작이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한용운이 평소 신뢰하던 청년승려들로 신상완을 비롯한 정병헌, 오택언, 백성욱, 김상헌, 김법린, 김봉신, 김대용, 김정원, 박민오 등이었다. 이들은 한용운의 지도를 받던 유심회(惟心會) 회원이었다. 불교연구와 민족사상 고취 및 불교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목표로 한 유심회 회장이 신상완이었다.
한용운으로부터 3.1운동의 거사내용과 불교계에 할당된 독립선언서를 교부받은 신상완 일행은 인사동의 범어사 중앙포교당에 다시 모여 독립운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의 긴급회의를 열었다. 우선 전국 불교계의 총궐기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중앙에 지도 연락기관인 ‘전국불교도독립운동 총참모본부(全國佛敎徒獨立運動總參謀本部)’를 그곳에 두고 신상완은 총참모가 됐다. 각기 부서를 정한 다음 밤을 새워가면서 실제 행동에 대한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이에 ①연락처는 인사동 신상완 집으로 정하고, ②3월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 모여 만세 시위에 참가할 것, ③교부받은 독립선언서는 각자 분담해 서울시내에 뿌리고, 나머지는 지역별로 호남지방 정병헌, 경북지방 김대용, 경남 양산 통도사 오택언, 동래 범어사 김상헌·김법린, 합천 해인사에는 김봉신을 파견할 것, ④중앙의 신상완을 책임자로, 백성욱과 박민오를 참모로 두고 모든 운동상황을 보고 받을 것, ⑤지방 파견원은 각사를 방문해 동지를 규합해 청년승려는 중앙으로 와서 실제 운동에 종사할 것, ⑥장기적 운동에 필요한 자금은 지방의 후원동지를 통해 모집하도록 할 것, ⑦지방 파견원은 각사를 방문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선언서를 다수 등사해 부근의 마을 및 도시에서 배부하고 만세시위를 할 것 등을 결정했다.
신상완을 중심으로 한 청년승려들의 조직적 결정에 따라 거대한 불교계의 3.1운동이 시작됐던 것이다.
◇의용승군으로 독립을 꿈꾸다
신상완은 1919년 4월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법린·백성욱·김대용 등과 더불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신상완은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백초월로부터 독립자금 2천 원을 안창호에게 전달하거나 박민오·김봉신이 모집한 운동자금 2천 원을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강원도 특파원으로 파견돼 철원 애국단(愛國團) 조직 및 석왕사, 은해사, 범어사 등지에 가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는 신상완을 ‘중요 배일파(重要排日派)’로 지목했는데,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여운형, 박용만, 신규식, 김규식, 이광수, 신채호 등 30명이었다. 불교계 인사로 신상완이 유일한데, “경기도 승려로 불교상의 수양(修養)도 상당하고, 승려계에 세력이 있어 그 대표자로서 상해에 왔다. 항상 조선의 승복(僧服)을 입고 다닌다”는 내용이다.
신상완이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보내기 위해 펴낸 4책 분량의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1919. 9)이다. ‘금강산 승려 신상완’이라는 유일한 실명으로 ‘일본의 한국불교에 대한 압박’이라는 글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신상완은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한 입장과 논리 및 대응책을 담은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大韓僧侶聯合會宣言書)’를 1919년 11월 15일자로 발표했다.
“우리 7천 승려는 결속하여 일어나서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기를 발원함과 의를 중하게 여기고 삶을 가볍게 여기는 의기를 누가 막을 것인가. 한번 결속하여 분기하는 우리들은 대원을 성취할 때까지 오직 전진과 혈전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비장함이 서려 있는 선언서였다.
선언서의 출처를 감추기 위해 신상완은 그 전날 일본정부의 초청을 받은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을 수행해 최근우(崔謹愚)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일제는 신상완이 1919년 9월말 상해에서 이종욱, 김봉신, 백성욱, 김법린 등과 협의해 승려의 단결을 도모하고자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 및 ‘임시의용승군헌제(臨時義勇僧軍憲制)’를 만들었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신상완은 일본에서 돌아온 후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 1878~1938)를 방문하고 불교청년으로 의용대(義勇隊)를 조직할 것임을 밝혔다. 전국의 승려를 규합해 ‘의용승군(義勇僧軍)’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고자 했다. 이것이 의승군의 오랜 전통에 기초한 ‘임시의용승군헌제’로 대한승려연합회장을 총장으로 하는 최고본부인 총령부(總領部)를 설치하고 임정정부와 연락, 작전계획을 세워 실행하도록 했다.
신상완은 이에 실제 석왕사, 해인사, 통도사 등 30본산 중 15개 본산을 선택해 기밀부(機密府)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불교계의 단결과 조직적 독립운동을 꿈꿨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1920년 4월 6일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이러한 공적으로 1995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한동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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