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로 떠나는 성지순례] 향교에서 천주교 성지까지… 양주가 품은 두 세계

⑭양주향교&양주 순교성지

2025-10-16     박찬희
양주향교 전경. 박찬희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양주로 여행을 떠났다. 양주향교와 양주 순교성지를 가려고 마음먹었던 때 마침 이날 양주관아지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양주는 경기 북동부에 자리 잡은 도시다. 조선 시대에는 의정부, 구리, 동두천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 모두 양주였다. 오랫동안 경기 북동부의 중심이었던 양주는 근현대를 거치면서 점점 규모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오랜 역사에 걸맞게 양주향교를 비롯해 눈여겨 볼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수도권 전철 1호선 양주역에서 내려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잔뜩 흐린 먹구름 아래 부드러운 산이 길게 누웠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저 정도라면 예부터 사람들이 편안하게 기대어 살만하겠다. 이 산이 양주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산이자 양주향교가 자리 잡은 불곡산이다. 산세가 험하거나 날카롭지 않아 오래 봐도 눈에 거슬림이 없었다.

양주향교 500년 느티나무와 외삼문. 박찬희

◇500년 느티나무가 지키는 양주향교

양주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시청을 지나 어느새 양주향교 정류장에 도착했다. 향교 입구에는 약 500년 된 느티나무가 터줏대감처럼 우뚝 섰다. 500년이라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다. 나무가 거목으로 자라는 동안 향교는 전란으로 사라졌다 세워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시대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민주주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향교에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진행하고 있다.

외삼문을 지나자 학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이 나왔다. 명륜당 앞마당 좌우에 있었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아직 복원하지 못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해 향교라면 어김없이 심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당에서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줬다. 마당은 간간이 은행나무 흔들리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옛날에는 학생들이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들은 오랜 시간 학문에 몰두한 끝에 과거 시험을 거쳐 관리가 됐다. 조선의 관리들은 행정가이자 문장가였으며 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들은 복잡하고 화려한 것 보다는 본질을 잘 담아낸 간결하고 담백한 문화를 추구했다.

공자 및 성현의 위패를 봉안한 대성전 영역을 보고 향교를 나왔다. 다른 향교가 그렇듯 양주향교 역시 간결하고 소박했다. 현대에 복원한 향교였지만 조선 사람들이 추구한 담백하면서도 기품 있는 위엄이 이곳을 감쌌다. 기교를 줄이고 단순함을 추구하는 현대 예술 경향을 미니멀리즘이라고 부른다. 양주향교에서 볼 수 있듯 미니멀리즘은 오랜 옛날부터 선조들의 생활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양주 순교성지 성모동산. 박찬희

◇노아의 방주 닮은 양주 순교성지 성당

한 나라에 새로운 사상이 들어올 때 기존의 사상과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상도 이런데 신앙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한국 천주교 역시 박해라는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며 점차 뿌리를 내렸다. 양주향교 바로 건너편이 양주 순교성지다. 조선을 이끌었던 성리학의 세계를 나와 조선에 충격을 던졌던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건너갔다.

순교성지는 보통 시골처럼 고추밭과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였다. 1895년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이름과 간략한 기록을 담아 ‘치명일기’를 간행했다. 훗날 천주교 의정부 교구에서는 ‘치명일기’를 바탕으로 이곳이 순교지 가운데 한곳임을 확인했다. 2016년 이곳을 성역화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마침내 올해 9월에는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병인박해 당시 다섯 명의 피로 물든 땅이 지금은 순교자와 순교의 의미를 기리는 뜻깊은 성지가 됐다.

산자락을 따라 조성된 양주향교와 달리 순교성지는 널찍한 평지에 펼쳐졌다. 오른쪽은 순례자의 집, 왼쪽은 성당, 뒤편으로는 성모 동산, 성지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이 마련됐다. 성지로 들어서서 성모상이 있는 성모 동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모상 주위에 여섯 개의 항아리가 빙 둘러 놓였다. 이 항아리들은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오는 여섯 항아리를 상징한다.

옆으로 이어진 십자가의 길에서는 성지순례를 온 순례자들이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경건해졌고 어느 순간 십자가의 길로 향했다. 정성들여 가꾼 손길이 오롯이 전해지는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았다. 순교자들은 붉은 피로 이곳에 신앙의 씨앗을 뿌렸고 후세 사람들은 잊지 않고 씨앗을 신성한 꽃으로 피워냈다.
 

양주 순교성지 성당 내부. 박찬희

이제 성지에 활짝 핀 꽃인 성당으로 들어갈 차례다. 성당 정면에는 순교자들에게 씌워졌던 목칼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목칼이라는 모진 고통을 이겨낸 힘은 보통 사람은 헤아리기 어려운 깊은 믿음이었을 것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목칼 너머에 있는 신성한 세상, 즉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성당은 위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내부는 노아의 방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설계됐다고 한다. 제대와 벽면에 놓인 스테인드글라스로 아름답고 은은한 빛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성당이 아담하고 고요하고 아늑해서인지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양주 순교성지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신자 여부를 따지지 않고 성당을 들리면 좋겠다 생각하며 성지를 떠났다. 계속 흐렸던 하늘 사이로 잠시 햇살이 내려왔다.
 

양주별산대놀이 전수교육관. 박찬희

◇양주 명물 별산대놀이 놓치지마세요

양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가 양주별산대놀이다. 양주는 잘 몰랐어도 양주별산대놀이는 어릴 때부터 책에서 종종 접해서인지 익숙하고 친근했다. 양주시의 SNS 대표 캐릭터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유래한 별산이다. 오랫동안 말로만 듣던 양주별산대놀이의 현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양주별산대놀이 전수교육관과 공연장은 양주 순교성지에 이웃한 곳에 자리 잡았다. 전수교육관으로 들어가자 놀이에 사용되는 탈, 의상, 각종 용품이 보였다. 탈은 눈과 입의 모양과 크기를 달리해 개성을 부각시켰다. 전시관 뒤쪽으로 돌아가니 널찍한 공연장인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 나왔다. 관심이 있다면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 홈페이지에서 공연 일정을 확인하고 공연 날짜에 맞춰 이곳을 방문하면 좋겠다 싶었다.

양주별산대놀이가 시작된 사연이 독특하다. 산대놀이는 중부 지방의 탈춤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 양주에서는 한양의 산대놀이패를 초청해 공연을 봤으나 이 패가 여러 사정으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자주 생겼다. 그러자 양주 사람들이 직접 산대놀이를 시작해 오늘까지 이어졌다고 전한다. 지금은 다른 지역의 산대놀이는 사라지고 양주의 산대놀이만 전해오고 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양주관아지로 향했다. 양주관아지는 양주관아가 있던 터를 뜻하는 말이다. 조금 걸어가자 양주관아지 입구인 든든한 외삼문이 나왔다. 외삼문을 지나 양주와 관아지의 역사를 전시한 양주목 역사관을 찬찬히 살펴봤다. 양주관아는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양주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중심지가 바뀌었고 관아 건물은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 2000년부터 2017년까지 발굴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중요 건물을 복원했다.
 

양주관아지 금화정과 계곡 모습. 박찬희

이곳이 양주의 중심지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관아지 이곳저곳을 걸었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에서 현명한 판결을 내리는 양주목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양주목사와 가족이 생활하던 내아에는 방마다 전통놀이도구가 마련됐다. 만약 가족과 함께 왔다면 한판 신나게 놀아도 좋겠다. 관아지를 나와 송덕비와 유허비가 차례로 늘어선 송덕비군, 정조가 이곳을 방문해 활을 쏜 것을 기념해 세운 비석인 어사대비를 만났다. 관아지 옆을 흐르는 작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 양주목의 화합을 뜻하는 금화정과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까지 둘러봤다.
 

양주별산대놀이 공연 모습. 박찬희

어느새 양주별산대놀이가 시작되는 시간이 가까워져 공연이 열리는 양주관아지 동헌 앞마당으로 서둘러갔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길놀이를 시작으로 별산대놀이가 본격으로 펼쳐졌다. 연희자의 부드럽고 절도 있는 춤사위에 감탄하고 해학적인 대사에 깔깔거리고 신나는 가락에 몸을 들썩거리는 사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래 전 역할을 다한 양주관아지가 새로운 역할을 맡아 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같았다.

하루 동안 양주의 여러 곳을 다니며 곳곳에서 꿈틀거리며 분출하는 힘을 느꼈다. 아마도 그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려는 양주 사람들의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