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괜찮은 ‘중도 유튜브’는 없나요?

2025-10-28     강준만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 식사 또는 술자리가 불편한가요?”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 본인 또는 자녀의 결혼이 불편한가요?” 조선일보·케이스탯리서치가 실시한 2023년 신년 기획 여론조사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응답이 각각 40.7%, 43.6%로 나타났다. 같은 해 6∼8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사회갈등과 사회통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는 연애·결혼할 의향이 없다”는 사람은 58.2%였다.

이런 조사 결과가 시사하듯이, 우리 사회의 정치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데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며, 그건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라는 데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 양극화의 해소 가능성도 높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진 않다. 우려한다는 건 상대 진영의 ‘어리석음’에 대한 우려일 뿐 자신이 중간을 향해 한걸음 옮겨볼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 역시 정치 못지 않게 양극화돼 있다. 언론은 특정 진영에 속하지 않는 독립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스스로 표방하는 ‘진보’나 ‘보수’는 사실상 특정 진영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색깔이나 노선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정치권에 진영간 상호소통이 없듯이, 언론 역시 그러하다. 색깔이 다른 언론사들은 동일 사안에 대해 정반대 되는 보도와 논평을 하면서도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상호 대화나 논쟁을 하는 법은 없다. 어차피 어느 한 진영에 길들여진 주요 고객 수용자들이 궁금해 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다.

소셜미디어와 유튜브로 대변되는 디지털 혁명이 공론장을 같은 편끼리만 모이는 곳으로 전락시키면서 정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간 진영을 넘어선 국익을 앞세워 정치 양극화에 저항하기도 했던 전통 언론마저 디지털 혁명의 아수라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튜브를 동반자로 이용하면서 사실상 정치 양극화에 투항하고 말았다.

이런 비극적인 현실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주범은 역대 정권들이다. 정치 양극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영향력 있는 중립지대는 공영방송임에도 정권들은 공영방송을 정파적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오히려 정파성을 강화하고 확산시키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공영방송을 그런 공익적 목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게 첫 번째 실패라면, 두 번째 실패는 유튜브를 오직 시장논리에만 맡겨두고 방치하는 바람에 정치 양극화를 가속시킨 주범이 되게 만든 것이다. 정치 양극화 해소를 위해 애쓰는 유튜브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간접적 지원이나 배려를 하면 안되는 걸까? 하다 못해 ‘중도 유튜브’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아이디어 공모같은 작은 시도라도 해보려는 문제의식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혹 ‘중도 유튜브’는 없나 하는 생각으로 검색을 해보다가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좌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유튜브를 보는 게 너무 힘이 든다. 딱 중간 중도의 스탠스를 가진 좋은 유튜브 방송 없나요?”라는 질문을 만나게 되었다. 댓글의 반응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중도는 스탠스가 애매해서 유튜브에서 장사가 안 되죠.” “어쩔 땐 좌쪽 편들고 어쩔 땐 우쪽 편들면 양쪽에서 쌍으로 욕먹음.” “둘 다 보거나 안보거나 밖에 없을 듯.” “중도층들은 걍 뉴스 보지 그런 거 안 보죠.”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절 그런 영상으로 이끌면 욕하면서 채널 삭제하죠. 돈 안돼요.”

그럼에도 포기할 순 없다. 정녕 중도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글 제목에 ‘중도’만 들어가도 화들짝 반기면서 탐독한 지 오래 되었건만 아직 이렇다 할 해법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긴 하지만,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환영이 8년 전에 쓴 칼럼의 여운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역시 참담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정치인들에게 선거 당선은 생명과도 같다. 강경파가 되는 게 당선에 유리하니까 강경파가 된다. ‘막말’이 정치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니까 ‘막말’을 한다. 저쪽 욕을 먹어도 대세에 지장 없다. 지지자들이 환호한다. 온건·중도파가 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칼럼 제목 그대로 “‘시끄러운 중도’가 필요하다”이다. 양극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시끄럽기에 밀려난 중도파들은 조용하지만, 그래도 기 죽지 말고 중도가 시끄럽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뜻이 없기에 중도가 된 건데, 시끄럽게 굴라고 요청하니 ‘동어반복’이 아닌가 싶어 힘이 빠지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정치 양극화의 폐해가 차곡차곡 쌓여 가면서 인내하기 어려운 수준에까지 도달한 게 아닌가?

지난 8월 한국일보가 ‘광복 80년’을 맞아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이념 성향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6%가 ‘중도’라고 답했다. 진보와 보수 성향은 둘 다 27%로 동일하게 나타났다. 가장 수가 많은 범주의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치 양극화에 가장 큰 피로와 염증을 느끼면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도무지 출구가 보이질 않으니, 사회적 존경을 누리면서 발언권이 센 지식인들께 호소라도 하고 싶다. 특정 정치인이나 진영을 지지하고 찬양하더라도 정치 양극화 해소를 위해 선거제를 포함한 모든 승자독식 제도와 관행을 바꾸자는 주장이라도 자주 해주면 좋겠다.

중도는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의 중간 지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보나 보수 둘 중 하나에 속하면서도 현실로 존재하는 정당이 가짜이거나 엉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당파가 된 넓은 의미의 중도도 있다. 이 후자의 중도가 시끄럽게 굴어줄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시끄럽게 구는 데엔 유튜브 이상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자꾸 시끄럽게 굴다 보면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떠오를 수도 있잖은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정작 분노하면서 결집해야 할 사람들은 중도다. 양 진영의 강경파들이 집단 패싸움을 벌이면서 나라 망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고 비분강개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애국심이 전체의 반쪽도 안되는 진영의 당파심이나 기존 유튜브 업자들의 돈 욕심을 능가할 수 없단 말인가? ‘중도 유튜브’에 대한 비관적 숙명론을 깨버리는 주인공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