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더하기] AI 전환기, 박물관의 역할을 묻는다

2025-11-17     강명호

최근 정부는 국가전략산업으로서 인공지능(AI) 분야의 투자 확대와 관련 인프라 구축을 범국가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주요 기업들은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립과 모델 개발 생태계 조성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글로벌 기술 기업들 또한 한국을 AI 개발과 실험의 거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산업, 의료, 교육, 행정 등 사회 전 영역이 AI를 기반으로 재편되는 흐름이 본격화하고 있는 지금, 공공 문화기관인 박물관 역시 이러한 변화의 바깥에 있을 수 없다. AI는 단지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사고방식과 학습방식, 나아가 지식의 생성과 공유 체계 전반을 재구성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오랫동안 ‘유산을 수집·보존·연구·전시·교육하는 기관’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 정의는 시대가 변화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덧입어 왔다. 인쇄·사진·영상 기술은 박물관의 기록 방식을 바꾸었고, 디지털 전환은 컬렉션 관리와 교육 방식을 넓혀왔다. AI 시대의 박물관 역시 단순히 기존 업무 효율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지식과 경험을 생산·유통하는 공적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첫째, 컬렉션 정보의 구조화와 연구 체계의 혁신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박물관 소장품 정보는 기록자에 따라 기술 방식이 다르고, 사진 중심으로 정리된 경우가 많았다. AI는 이미지·형태·재질 등 다층적인 속성을 동시에 분석하고 대량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유산의 제작 배경, 지역·시대별 특징, 기술적 계보를 보다 체계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표준화된 데이터 구축, 학계·연구기관·기술기업과의 협력, 인문학과 정보과학을 연결하는 융합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둘째, 관람 경험의 개인화와 확장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기존 전시는 동일한 설명과 동선을 전제했다. 그러나 관람자는 각기 다른 배경지식, 관심사, 감각적 선호를 지닌다. AI는 관람자의 선택, 체류 시간, 질문 반응 등을 학습하여 서로 다른 깊이와 방식의 해설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의 전시가 관람자 수만큼 다른 체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박물관을 ‘정보 제공의 장소’에서 ‘자기 탐구의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셋째, 교육 프로그램의 물리적 제약을 넘어선 공유와 소통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온라인 투어, 디지털 아카이브, 실감형 콘텐츠는 이미 확산되고 있지만, AI는 이에 상호작용성과 학습 맥락에 대한 인식을 더해준다. 이를 통해 지역 간 문화 향유 격차를 줄이고, 이동이 어려운 관람자·학습자에게도 동등한 접근을 제공할 수 있다. 박물관은 물리적 건물을 넘어 ‘연결된 공공 지식 네트워크’로 확장되는 것이다.

넷째, 박물관은 지역 문화·산업 생태계를 잇는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넓혀야 한다. AI는 전통적 문화 요소의 분석과 재해석을 돕고, 디자인·관광·교육 산업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 가능성을 키운다. 이는 박물관이 유산을 단순히 보존하는 기관을 넘어, 지역 정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술 도입이 곧바로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박물관이 지켜야 할 가치와 정체성을 명확히 설정하는 일이다. 박물관의 핵심은 결국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성찰하게 하는 데 있다. AI는 그 과정을 보조하고 확장하는 도구일 뿐, 해석과 공감, 체험의 깊이는 여전히 사람에게서 나온다. 기술 중심의 혁신이 아니라, 인간 경험 중심의 혁신이어야 한다.

지금 박물관이 서 있는 자리는 단순한 변화 대응의 단계가 아니라, 미래의 지식 인프라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묻는 전환점이다. AI는 박물관의 존재 이유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박물관이 오래 다져온 기록·연구·교육의 역할을 더욱 넓고 깊게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미래의 박물관은 기술을 따라가는 기관이 아니라, 기술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사회에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박물관이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때, 박물관은 시민에게 더욱 친밀하고 유용하며, 더욱 사랑받는 공적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강명호 경기도자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