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메모] “나도 잘한 것 없지만”
얼마 전 퇴근길에서의 일이었다. 수원의 한 번화가 정류장에서 10여m쯤 출발한 버스를 중년의 남성이 대로 한가운데까지 달려 나와 막아서고 두어 차례 때렸다. 태워달라는 뜻이다. 하마터면 사고를 낼 뻔한 기사가 벌컥 화를 내자 그 아저씨도 덩달아 “정류장에서 손님을 태운 게 아니지 않느냐”며 맞대응했다. 나도 잘한 것 없지만 당신이라고 잘한 게 있느냐는 피장파장의 논리였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심야의 번화가가 언제나 그렇듯 불법주정차 차량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어 기사는 버스를 정류장에서 떨어진 지점에 세워 손님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남자는 누가 봐도 벌건 얼굴에 혀가 말려가는 모습이 약주를 거나하게 한 모습이었지만, 버스기사의 잘못을 구실로 자기 행위를 방패삼는 논리 하나는 기막히게 일관적이었다. 몇 차례 언성이 오간 뒤 “그러니까 나도 잘못했다고 하잖아”라는 남자의 말로 일단락됐으나 이는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강요지 올바른 사과가 아니다.
피장파장의 어법은 유치할지언정 쉽고 간단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기 좋고 공감대를 끌어내기도 탁월하다. 그러나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우선만 고집하는 태도가 사회를 우점할수록 법과 질서는 완전히 무시되고 엉망진창으로 전락하며 설령 이득을 볼지언정 자신의 가치, 나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까지 크게 깎아내리게 된다. 그 아저씨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할 지경이었다. 그 남자는 내리면서 속으로 ‘내가 이겼다’라고 쾌재를 불렀을 테지만, 나는 행여나 기사님이 ‘이 동네 사람들은 어쩔 수 없구나’라는 편견을 제발이지 갖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정영식 디지털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