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칼럼] 엄마의 건강노트가 남긴 교훈
최근 AI 기반 진단 솔루션을 개발하는 헬스케어 스타트업 대표가 연구실을 찾았다. 의료현장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체감하는 사람답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앞으로 10년이면 병원을 찾는 횟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건강의 출발점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과장된 전망처럼 들리지만, 오히려 이미 시작된 흐름을 알리는 선언에 가까웠다. 그가 설명한 미래는 거대한 의료 혁신이 아니라, 곧 일상에 스며들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른 새벽, AGI(범용인공지능)는 사용자의 몸을 먼저 읽는다. 심박의 흔들림, 수면의 깊이, 새벽의 스트레스 반응을 결합해 점심 무렵 나타날 부정맥 가능성을 미리 경고한다. 그리고 조용히 권고한다. “오늘 카페인은 평소의 절반으로 줄이세요. 점심 후 20분 산책을 추천합니다.” 병원 방문도, 처방도 없다. 병이 생기기 전에 하루의 구조를 조정하라는 건강관리 방식이 열리는 것이다. 그 설명을 듣는 동안, 한국 사회의 건강을 둘러싼 오래된 풍경이 다시 떠올랐다. 이처럼 의료기술은 세계 최고지만 정작 건강은 병원 안에서만 찾으려는 독특한 문화 말이다. 몸의 피곤함, 스트레스, 수면의 질 같은 기본적인 신호조차 스스로 읽어내지 못한 채 모든 문제를 병원에서 해결하려는 습관은 기술의 속도보다 더 느리게 바뀌고 있다. AI와 AGI(범용인공지능)가 예측을 맡아주는 시대가 눈앞에 와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건강을 일상의 구조가 아닌 의료시설의 반응으로 이해하는 데 머물러 있다.
AI가 그려주는 미래는 기술의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의 출발점을 다시 묻는다. “치료 이전에, 건강은 어떤 생활 구조에서 시작되는가?” 기술은 예측을 돕지만 건강을 지탱하는 힘은 결국 생활의 리듬이다. 해외 여러 나라에서 보았던 ‘도시의 풍경, 걷기 좋은 거리, 무리하지 않는 노동,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 쉼이 있는 저녁’은 건강이 의학적 기술보다 ‘덜 무너지는 일상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운다.
그러다 지난해 곁을 떠나신 어머니가 갑자기 떠올랐다. 구순이 넘도록 노트를 늘 곁에 두고 혈당과 혈압을 하루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가던 분이었다. 아침의 미세한 변화, 식사 후의 컨디션, 잠들기 전 마지막 기록까지 빼곡히 적힌 엄마의 노트는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자기만의 언어로 몸을 읽어내던 방식, 즉 스스로의 삶을 조율하던 가장 인간적인 기술이었다. AI가 데이터를 자동으로 기록해 주는 시대가 와도 이 노트가 담고 있던 감각만큼은 쉽게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그 노트를 다시 펼쳐보며 깨닫는다. 하루 영양제 10알을 몸속에 채워 넣는 일이 건강을 책임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어머니가 노트에 남기던 그 조용한 관찰이 몸을 더 깊이 지켜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건강의 본질은 약의 개수나 기술의 정밀도보다 자신의 몸의 신호에 귀 기울이고 하루의 리듬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태도에 있었다.
이처럼 건강은 병이 생긴 뒤 고치는 문제가 아니라, AI가 보여주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루의 리듬을 다시 설계하는 문제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그 리듬을 어떻게 만들지는 결국 인간의 선택이다. 예측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해석 능력은 더 중요해지고,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인간의 감각은 더 큰 책임을 요구받는다. 이 지점에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어느 책에도 쓴 적 없는 삶에 대한 마지막 대답’에서의 문장이 떠오른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서 우리는 삶의 방향을 선택한다.” AI가 예측을 앞서 제시해도, 그 예측을 어떻게 살아낼지는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이라는 뜻이다. 그 공간을 일상의 무게로 채울지, 다시 삶의 리듬으로 세워갈지는 지금 우리가 내려야 할 선택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건네는 신호를 삶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다. 기계가 수치를 관리할 수는 있어도, 삶의 리듬을 선택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김형태 성균관대학교 인공지능융합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