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의 첫 집은 답십리 달동네였다. 자식 여섯 중에서 아래 넷만 데리고 밤기차로 떠나신지 1년쯤 후 5학년 겨울방학에 할머니 손에 맡겨졌던 바로 밑 여동생과 함께 엄마의 손에 이끌려 똑같은 야간완행열차에 몸을 실었고 어스름 새벽에 도착한 서울역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목을 파고드는 서울의 쌀쌀한 바람에 덜덜 떨고 있는 시골 녀석의 눈에 서울역에서 건너다보이는 어마어마한 실루엣으로 서울의 첫 인상을 각인시켜주었던 대우빌딩은 공사가 한참진행 중이었다. 새벽버스를 타고 엄마가 앉혀준 자리는 뜨거운 엔진이 자리한 운전사아저씨 옆 커다란 엔진덮개 위였다. 너무 뜨거워 호떡처럼 돌아눕기를 반복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풍경에서 청계천 고가도로를 지날 때 세상에 그렇게 크고 긴 다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던 시절이다. 그렇게 도착한 이른 아침의 서울 집은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고 가파른 산행을 해야 도착하는 달동네였다. 얼음과 눈이 덮인 길 이곳저곳에 깨어져 뒹굴고 있는 연탄재가 신기했던 달동네를 오르는 길에 낯선 연탄가스냄새가 코를 찌르는 골목을 지나 꼭대기 어귀의 시멘트가 거칠게 발라진 낮은 담장을 가진 방 5개짜리 기역자 토담집이 내가 서울살이를 한 첫 집이다. 문간방에서 사셨나보다. 작은 방에 들어서니 동생들 넷이 반긴다. 비닐로 만든 초록색 알록달록한 옷장과 단스라 부르던 키 낮은 서랍장위로 이불과 베개가 놓여있고 바닥에 깔려있는 큰 이불속으로 동생들이 오글거리는 모습을 보다 엄마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방에 딸려있는 작은 부엌이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연탄아궁이와 작은 석유곤로가 있고 나무로 만든 사과상자 두 개를 얹은 찬장이 보인다. 서울생활의 시작이다.

최근에 전태일 열사 분신 50주년 다큐 TV프로그램 타이틀 을 의뢰받아 작업을 했다. 짠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은 그의 용기보다는 나보다 더 힘든 시기를 지낸 선배로서의 그의 인간성에 마음이 더 저린 까닭이다. 처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구경했던 청계고가다리와 그 주변의 평화시장 등이 그의 삶의 무대였으며 그곳에서 도봉동까지 가진 차비를 종일 쪽가위에 손이 부르터진 어린 봉제사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느라 털어버리고 그 먼 길을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에 한 없이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 전태일과 함께 했던 그 어린 봉제사들, 엄밀히 말하면 시다라 불리던 보조들 사이에 나의 여동생 둘도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쪽가위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생활 3년쯤 지났을 즈음이다. 내 밑 여동생 둘을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시켜 보조로서의 월급으로 집안 장남인 나와 남자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야했던 부모님의 선택에 선택의 여지없이 내몰렸던 여동생들의 손에 들려 집으로 왔던 쪽가위의 첫 모습은 앙증맞지만 날카로움을 함께 가진 신기한 모습이었다. 남은 실밥이나 천의 끝단부분을 최종 다듬는데 사용했던 기능을 가진 쪽가위에 대한 첫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퉁퉁 부은 다리를 가진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여동생 둘의 모습에 아파하던 가슴이 이렇게 평생을 끌어안고 있을 줄 몰랐다. 그녀들의 희생으로 어찌되었든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서울의 첫인상을 만들어주었던 대우빌딩으로 출근하는 직장생활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녀들을 보게 될 때는 조카들이나 내 자식들이 고모들에게 좀 더 잘했으면 좋겠다는 꼰대 같은 생각을 하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나의 순진한 바람일 뿐이며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안다. 전태일을 생각하면서 여동생들과 쪽가위를 떠올린 오늘은 그래도 행복했었던 기억이다.

유현덕 한국캘리그라피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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