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랑 한 장뿐인 월력, 매해 벽두에 1년을 설계하지만 용두사미다. 실행을 하루하루 미루다 결국 12월이 코앞이다. 그제야 발을 구르지만 무슨 소용인가. 말하자면 금년 목표도 물 건너 간 셈이다. 어쨌거나 공수표가 될망정 그 해 목표를 빼먹지 않고 세우는 편이다. 비록 일개 시민이지만 그해 목표가 없으면 왠지 허전하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갑진년 새해는 어떤 각오로 맞이 할까나. ·
갑진년 새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중국 드라마를 보다 무릎을 쳤다. 마침 촉나라 재상 제갈량이 사마의(위나라)와 싸우러 전장으로 향하는 장면이다. 그때 제갈량이 출병하며 군주에게 출사표를 던진다. 그 표문이 천고의 명문이라기에 찾아보았다. 대뜸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다.’ 라는 설명이다. 자자한 명성대로 행간마다 충정이 가득하고 구구절절 국태민안을 걱정하는 내용이다. 그야말로 순신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는 제 백성을 식솔처럼 위해야 하거늘·
각설하고 난데없는 출사표라니. 드라마 속에서 유독 ‘출사표’라는 낱말에 꽂혔기 때문이다. 정초마다 그해의 계획을 세우지만 말짱 허사다. 매양 그 타령이니 맥이 빠질 수밖에. 이제 그 부담에서 나를 해방시켜야겠다. 거창한 공약(空約)이 아니라 내게 맞춤한 목표를 세워 새해 출사표로 삼으리라.·
때마침 모일간지의 기사가 시선을 끈다. 금년, 무려 104세가 된 철학자요 노교수의 인터뷰다. 그의 새해 소망은 ‘시인’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 연배에도 꿈을 꾸다니. 분명 그것은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용기를 내라는, 새해 희망의 메시지일 테다. 꿈은, 삶의 절대 끈이라는 것을. 온화하고 결연한 그의 인품에 머리를 숙인다. ·
꿈을 잃으면 삶이 메마르고 자존감마저 추락할 진대. 내 비록 기년을 훌쩍 넘겼지만 그분에 비하면 아직 청춘 아닌가. 자, 청룡의 기운으로 희망의 꿈을, 출사표를 던지고 비상해 보자. 나의 자잘한 일상이 윤슬처럼 반짝반짝 윤나게.
한정희 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