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고양 태고사
북한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이다. 서울·경기에 걸쳐있어 접근성이 좋을 뿐 아니라 명소가 많기 때문이다.
국립공원 중 가장 많은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공원 내 위치한 사찰만 해도 1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 중 진관사, 삼천사, 도선사, 승가사 등 유명사찰이 많지만 오늘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유서 깊은 태고사를 소개하려 한다.
◇작지만 유서깊은 태고사=북한산 태고사에 가기 위해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잡았다. 등산로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북한산성 대서문(大西門)이다. 규모로 보면 대동문(현 대성문) 다음이지만 북한산성 문루 중 가장 오래되었다.
1712년(숙종 38년) 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 때 이 문을 통과했다 전해지고, 지금도 산성의 주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서문을 통과하여 계곡 따라 평탄한 길을 가다 보면 중성문이 나타난다. 중성문 안쪽부터는 북한산성 내성에 해당하는데 중흥사, 상창, 행궁 등 북한산성의 주요시설이 위치한다. 중성문에 이어 중흥사가 보이면 태고사가 멀지 않았다.
태고사(太古寺)는 1341년(충혜왕 복위 2) 태고(太古) 보우(普愚) 스님(1301~1382)에 의해 처음 창건됐으나 이후 연혁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다.
다만 조선시대 초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고사가 법등을 다시 잇게 된 것은 1711년 북한산성을 쌓을 때이다.
산성의 축성과 승병의 주둔을 위해 중흥사를 포함해 12개 사찰을 지었는데, 당시 폐허로 남아있던 옛 태고암 자리에 태고사를 다시 지었다. 당시 절의 규모가 131칸에 달했다고 하니 상당히 큰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 한국전쟁 때 폐사됐다.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4년 청암(靑岩) 스님의 중창 이후이다.
◇문화유산 간직한 가람=태고사를 비롯한 북한산성 내 12개 사찰을 일으킨 것은 계파(桂坡) 성능(性能) 스님이었다. 성능 스님은 원래 경북 학가산(鶴駕山)의 승려였으나 지리산 화엄사(華嚴寺)로 들어가 벽암(碧巖) 각성(覺性) 스님 문하에서 수행했다.
스님은 1699년(숙종 25)에 화엄사 장육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을 짓고, 1705년(숙종 31)에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건했다. 숙종은 1711년(숙종 37) 성능 스님에게 북한산성 축성을 맡기고 그를 도총섭(都總攝)에 임명했다.
도총섭은 승군을 총지휘하고 산성의 축성과 방어를 담당하는 우두머리 승장이다. 성능 스님은 북한산성을 6개월만에 완성하고 수축과정과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북한지(北漢誌)를 남겼다. 북한지는 오늘날 산성을 복원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금의 태고사는 성능 스님이 주석할 당시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세가 작아졌지만, 대웅전, 비각, 산신각, 요사 등이 조성되며 꾸준히 법맥을 이어오고 있다. 태고사에는 창건주 보우 스님 관련한 문화유산이 몇몇 전한다. 보물로 지정된 원증국사탑비와 원증국사탑이다.
비각 안에 놓인 원증국사탑비(보물)는 보우 스님의 탑비이다. 원증(圓證)은 보우 스님의 시호이며, 1382년(우왕 8)에 이 절에서 입적했다. 탑비는 다소 둔하고 거칠게 조각된 거북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형태를 하고 있다. 비신에 보우 스님의 출생과 행적이 새겨져 있는데, 이색이 짓고 권주가 글씨를 쓴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보우 스님은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3살 때 회암사로 출가했고, 40살에 삼각산(북한산의 옛 이름) 중흥사에 주석했으며 태고암을 창건했다고 한다.
비각 옆으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산신각이 나온다. 자연암반을 있는 그대로 한쪽 벽체로 삼고, 반대쪽 벽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자그마한 전각이다. 산신각을 지나 몇 계단 더 오르면 보우 스님의 사리가 모셔진 원증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보우 스님의 사리탑은 태고사 외에 양산사, 사나사, 청송사 등에도 있다.
탑은 4각의 하대석 위에 8각의 중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원형에 가까운 상대석을 얹었다. 상대석에는 굵은 선으로 연꽃무늬와 고사리무늬를 새겼다. 그 위에 원형의 탑신을 두고 옥개석을 올렸는데 옥개석 귀퉁이마다 꽃장식이 새겨 있다.
옥개석 위에 상륜부를 이루는 돌이 여럿인데, 맨 꼭대기 보주 아래에 놓인 원반형 돌이 탑과 짝이 맞지 않는 듯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찍힌 사진을 보면 탑이 두 기로 나뉘어 있고, 석탑의 옥개석 부재가 섞여 눈에 띤다. 무너진 탑을 두 기로 나눠 세우면서 다른 석탑, 석등 부재들과 혼용한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성능스님 만날 수 있는 봉성암=태고사 일정을 마치기 전 들러야 할 곳이 더 있다. 태고사를 크게 일으킨 성능 스님을 만날 수 있는 봉성암이다. 태고사 경내를 빠져나와 산정상부를 향해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가면 20여 분 만에 닿을 수 있다.
봉성암은 중흥사, 태고사와 마찬가지로 북한산성을 축성하면서 지어지고 성능 스님이 수년간 머물렀던 곳이지만 어느 시기 폐사됐다.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30여년 전 관송스님이 터를 다시 잡고 천막법당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장엄한 극락보전을 갖추게 된 곳이다.
새로 지은 극락보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끝까지 오르면 성능 스님 부도라 전해지는 승탑을 만나게 된다. 석축을 쌓아 작은 터를 만들고 4매의 사각형 대석으로 지대를 마련해 만든이의 정성이 엿보이는 승탑이다.
기단부를 이루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은 사각, 원형, 팔각형으로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다채롭고 흥미롭다. 이에 비해 팔각형 탑신은 특별한 장식 없이 간결하다. 탑신 위의 지붕돌은 파손되었는데, 떨어져 나간 파편이 주변에 방치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곳에선 눈 앞에 북한산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이 펼쳐지고, 신록이 우거진 지금 같은 계절이 아니라면 아래로 북한산성, 그리고 산성을 지키는 사찰들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일 것 같다. 북한산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자리이다. 성능 스님도 생전에 이곳을 오르내리며 수없이 지켜보았을 풍경일 것이다. 스님이 입적 후에도 이 작은 터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글·사진=김지영 헤리티지포올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