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고양 상운사

상운사 가는길. 사진=박찬희
상운사 가는길. 사진=박찬희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다 배가 너무 아팠다. 그때는 양호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조퇴를 하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걸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와 주저앉았다. 이 모습을 본 선생님은 깜짝 놀라 나를 교무실로 업고 오셨다. 그리고 동네 이장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고 이장님은 마을회관 스피커로 동네 방송을 했다. 그때 어머니는 밭에서 일하고 계셨을 거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날아오듯 달려오신 어머니를 보고 놀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밭에서 학교까지 달려오는 동안, 의사에게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심정을 헤아린 건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느 날 저녁 어린 딸아이가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무작정 약국으로 달려갔는데 ‘별일 아니겠지’와 ‘혹시나’ 하는 불안이 널을 뛰었다. 그날따라 걸음은 왜 이렇게 더디던지. 약을 받아든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안심하라던 약사가 부처님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실제로 약사부처님이 계신다. 손에 동그란 약합을 들고 있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본다. 약사부처님이 널리 알려진 절이 여럿인데, 북한산에 자리 잡은 상운사도 그 가운데 하나다.

상운사로 가는 오솔길. 사진= 박찬희
상운사로 가는 오솔길. 사진= 박찬희

◇간절한 마음으로 약사부처님 만나러 가는길=상운사 약사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상운사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완만한 계곡길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산길이 시작된다. 송골송골 맺히던 땀이 물흐르듯 쏟아지고 숨이 턱턱 막힐 무렵 갈림길이 나온다. ‘상운사는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지었을까, 사람들이 오기 편하지 않은데.’ 갈림길에서 상운사까지 숨고르기 좋은 오솔길이 이어졌고 땀이 멎을 무렵 상운사가 환하게 나타난다. 간절한 마음으로 약사부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마음으로 걷는 길이다.

상운사에 들어서는 순간 움찔 놀란다. 절 마당에 길게 드러누운 개가 낯선 소리를 듣고 컹컹 짖는다. 절 마당에서 개를 만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그 사이 개는 귀찮다는 듯 다시 길게 드러누웠다. 으레 하는 일이 그렇다는 표정이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몇 걸음 걷자 상운사가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상운사 경내를 훑어보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눈 앞으로 백운대, 만경봉, 노적봉이 빙 둘러섰다. ‘이래서 가파르고 험한 이 곳에 절을 지었구나.’

상운사 전경 사진=박찬희
상운사 전경 사진=박찬희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북한산에서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하지만 상운사에서 마주한 풍경은 다르다. 웅장하고 압도적이었으며 기운이 넘쳤다. 산봉우리에서 흘러나온 상서로운 기운이 상운사로 쏟아져 흘러들었다. 옛 사람들은 이런 산봉우리를 부처와 보살에 비유하곤 했다. 상운사 앞 산봉우리는 법당을 나온 부처와 보살이었다. 직접 본 상운사는 북한산까지 확장된 넓디넓은 절이었다.

먼저 대웅전과 천불전을 들른다. 천불전 안에는 수많은 부처님이 줄맞춰 봉안되었고 앞쪽 중앙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아미타삼존불이 자리 잡았다. 수많은 부처님은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라는 불교 사상인 ‘일즉다 다즉일’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 세상 어느 곳이나 내리는 달빛처럼 어느 곳이든 존재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어느 시대에나 있다는 믿음을 일깨운다. 이 부처님들은 힘들고 괴로워하는 그 순간에도 바로 곁에 있다고, 그러니 마음 편히 기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제 약사부처님을 만나러 옛 사람들이 갔던 길을 따라 올라간다. 그들은 시름시름 앓는 어린 자식, 백약을 써도 효과가 없는 남편, 목숨이 경각에 달린 부모를 위해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의약이 발전한 현대에도 급한 순간에는 세상의 모든 신을 찾는다. 큰 병을 앓는 가족이 있다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또 올린다. 그 옛날 멀고 험한 이곳까지 찾아올 정도면 그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된다.

상운사 천불전의 부처님. 사진=박찬희
상운사 천불전의 부처님. 사진=박찬희

◇500년간 이어진 인자한 손길과 미소=상운사에서 가장 높고 깊숙한 곳에 약사부처님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기다리신다. 약사굴이라는 이름답게 돌로 만든 집 안에 모셔졌다. 나무나 청동이 아니라 돌로 만든 석불이다. 얼굴은 어디서나 만날 법한 평범한 얼굴이다. 근엄하거나 엄격하지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을, 깊은 속마음을, 간절히 바라는 바를 편하게 말하고 싶어진다. 보면 볼수록 인자한 약사부처님은 내 손은 약손이라며 손주의 배를 쓰다듬던 할머니 같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따뜻한 그 손길과 미소는 멈춘 적이 없었다.

약사부처님의 바닥에는 먹으로 쓴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으로 불상을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과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지금부터 무려 5백여 년 전인 1497년에 만들어졌다. 그동안 약사부처님 앞을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까지 다양한 시기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시대는 달라도 바람은 크게 다르지 않아 아픈 사람은 어서 낫고 건강한 사람은 계속 건강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삼층석탑에서 본 북한산 풍경. 사진=박찬희
삼층석탑에서 본 북한산 풍경. 사진=박찬희

약사굴을 나와 삼층석탑으로 간다. 탑은 보통 가장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지만 이곳에서는 산자락에 홀로 놓였다. 탑 앞으로 보이는 여러 산봉우리의 영험한 기운이 탑으로 몰려오는 듯싶다. 또 그 기운이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저절로 합장을 하게 된다.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상운사는 적어도 고려시대부터 존재하다 어느 순간 폐허가 되었고 1722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약사부처님이었을 거라고 상상해 본다.

◇바위에 새겨진 승병 이야기=가벼운 마음으로 상운사를 내려와 다른 산길을 오른다. 이번에는 ‘북한 승도절목’을 만나러 간다. 조선 후기 북한산성 방어에는 승려 군인 즉 승병의 역할도 컸다. 북한산에 있던 여러 절들은 북한산성을 지키는 일종의 기지였다. 스님들은 수행에 정진하랴, 산성을 지키랴 할 일이 많았다. 스님들은 어떤 이야기를 바위에 새겨놓았을까?

큰 바위에 새긴 북한 승도절목. 사진=박찬희
큰 바위에 새긴 북한 승도절목. 사진=박찬희

절 그 다음에 절. 상운사로 오르는 길과 달리 ‘북한 승도절목’을 보러 가는 길에서 여러 절의 이정표를 만난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풍경으로 옛날 북한산성을 지키던 절들이다. 독특한 점은 또 있다. 길은 경사졌지만 넓고 잘 정비되었다. 이 길은 북한산성 안에 있는 행궁으로 올라가는 길이기도 해서 오래전부터 잘 관리되었을 거다. 길을 오르다보면 성문인 중성문이 나온다. 우뚝 솟은 중성문을 보니까 이곳에 북한산성이 있다는 걸 비로소 실감한다.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보면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그런데 바위 이곳저곳에 버섯처럼 사각기둥이 솟았다. 무덤의 비석도 아닌데 이 산속에 무슨 비석이 이렇게 많은 걸까? 이건 북한산성 최고 책임자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였다. 선정비를 볼 때면 선정비의 주인공들은 어떤 일을 잘 했기에 비까지 세웠는지, 혹시 업적과 관계없이 의례적으로 세운 건 아닌지 궁금해진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히던 산영루. 사진=박찬희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히던 산영루. 사진=박찬희

선정비 사이 바위의 넓적한 면을 사각으로 파내 바탕을 마련한 후 빼곡하게 새긴 글이 보인다. 만나려고 한 ‘북한 승도절목’이다. 선정비가 관리의 업적을 드러냈다면 승도절목은 스님들의 중요한 인사 원칙을 기록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스님들에게도 인사가 중요했다. 잘 보이는 곳에 바위에 새겨놓을 정도로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은 북한산성 승병 대장인 총섭을 뽑는 규칙이었다.

‘북한 승도절목’에서는 총섭은 북한산성 안의 승려 가운데 투표로 뽑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바위에 새겨놓은 덕분에 당시에는 이 규칙은 꼭 지켜야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웠고 지금은 옛날 승병 운영 방식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가 되었다. 북한산성을 지키던 스님들에게 경치 좋은 이곳은 수행의 터전이자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북한산 입구에서 본 북한산. 사진=박찬희
북한산 입구에서 본 북한산. 사진=박찬희

선정비와 ‘북한 승도절목’ 바로 앞에 아름다운 누각이 서있다.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의 하나로 꼽히던 산영루다. ‘산영’은 북한산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춘다는 뜻으로 누각 바로 앞이 북한산 계곡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간 누각을 2014년에 복원했다. 지금은 누각에 올라갈 수 없어서 산영루에서 보는 풍경을 그저 상상할 뿐이다. 하지만 옛날 이곳에 온 사람들은 누각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고 감흥을 시로 남겼다. 산영루에는 ‘험한 돌길 끊어지자 높은 난간 나타나니’로 시작하는 정약용의 시가 걸렸다.

이제 북한산을 내려갈 시간이다. 북한산이 아름다운 건 사람들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묵묵히 사람들을 지켜주던 절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북한산을 오른다.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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