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고양 노적사

중성문에서 바라본 노적봉
중성문에서 바라본 노적봉. 사진=김지영

◇나라 지킨 북한산 사찰=북한산을 보면 대찬 기운이 느껴진다. 서울과 경기에 걸쳐 백운대, 인수봉, 만경봉, 보현봉, 문수봉, 원효봉, 노적봉 등 서른 개에 달하는 암봉이 웅대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서울의 진산으로 삼을만한 명산임을 실감케 한다. 사람들은 북한산의 지기(地氣)에 대해 종종 이야기한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무당들이 험준한 봉우리 아래 자리 잡고 영험을 빌었고, 1950년대까지 호랑이 목격담이 있어 사람들에게 신령한 곳으로 여겨졌다. 북한산이 지금처럼 연간 5백만 명이 찾는 시민의 명소가 된 것은 1977년 산악인 고상돈씨가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등산 붐이 일면서부터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북한산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아들 온조가 남쪽에 나라를 세울 터를 살피려 올랐던 부아악으로써, 백제 건국 설화가 서린 곳이다. 또한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비봉 정상에 순수비를 세우기도 했다. 원효봉과 의상봉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효와 의상 스님이 참선한 곳으로써 불교와도 인연이 깊다. 북한산 안에 수많은 불교사찰이 지어지고 폐사되기를 반복하였고 지금도 진관사, 삼천사, 중흥사, 태고사, 노적사 등 이름난 절들이 북한산에 자리한다. 숙종 37년(1711) 때 북한산성을 축성하면서 북한산 내 사찰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석굴에 조성된 삼성각. 사진=김지영
석굴에 조성된 삼성각. 사진=김지영

조선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국방을 위해 전국 각지에 많은 산성을 축조하였는데, 여기에 크게 공헌한 것이 승군이었다. 승군은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봉기한 의승군의 활약에서 시작되었다. 영규스님, 휴정스님 등이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조직적으로 승군을 지휘하며 전세를 반전시켰다. 승군은 바다와 육지를 가리지 않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장을 종횡무진 하였고,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일 때는 군량을 마련하고 산성을 보수하면서 국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조 2년(1624)에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등 전국각지에서 동원된 승군들은 평양성을 쌓고, 이어 남한산성을 쌓았다. 인조는 구례 화엄사의 벽암 각성스님을 제1대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하고 남한산성의 축성과 수비를 맡겼다. 벽암 스님은 산성을 축성하는 동안 승군이 머물며 숙식과 훈련을 할 수 있는 승영사찰을 짓고 운영하였고, 이러한 승군제도는 숙종 때 북한산성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1711년(숙종 37)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북한산에 북한산성이 축성된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강화산성과 남한산성만으로 수도를 완벽하게 방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숙종은 구례 화엄사 출신의 성능스님을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하여 북한산성의 축성을 명한다. 남한산성 때와 마찬가지로 승군제도가 활용되고 성 내부에 승영사찰이 운영된다. 당시 북한산에는 쇠락한 중흥사만 30여 칸의 작은 규모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많은 승군을 배치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찰 건립이 필요했다.

성능스님은 기존의 사찰을 중건하고, 상운사, 서암사, 진국사, 보국사, 보광사, 용암사, 태고사, 국녕사, 원각사, 부왕사, 그리고 봉성암과 원효암을 새롭게 창건해 13개의 승영사찰을 갖추었다. 이 사찰들은 중흥사를 중심으로 수도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중 진국사가 오늘날의 노적사이다.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 사진=김지영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 사진=김지영

◇계곡 따라 노적사 찾아가는 길=성능스님이 집필한 북한지 기록을 보면 ‘진국사는 노적봉 아래 위치하고, 85칸으로 중성문 안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진국사는 알 수 없는 시기에 완전히 폐사되어 빈터만 남게 되었다. 진국사가 이름을 노적사로 바꾸고 법맥을 다시 잇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이다. 1960년대 무위스님을 비롯한 여러 승도들이 뜻을 모아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창한 것을 시작으로 점차 나한전, 미륵불입상, 용궁전, 삼층석탑 등을 갖추게 되었다.

노적사로 가는 가장 짧은 코스는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잡는 것이다. 초입에 포장로를 잠시 걸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편히 갈 수 있는 평탄한 길이고, 왼쪽은 계곡을 따라 가는 등산로이다. 개인적으로 계곡 등산로를 추천하고 싶다. 북한산의 심산유곡을 경험할 수 있고, 게다가 머지않아 두 길이 만나기 때문에 평탄로의 편안함은 잠시뿐이기 때문이다.

대웅전과 석사자상. 사진=김지영
대웅전과 석사자상. 사진=김지영

계곡을 따라가며 제일 먼저 만나는 사찰은 서암사이다. 서암사 역시 승영사찰로 건립되었다가 어느 시기 폐사되어 터만 남았던 것을 근래 발굴조사를 거쳐 새롭게 복원되기 시작했다. 이어 북한산성 입구가 나타나면 두 번째 갈림길이다. 여기에서 중흥사 방향으로 가면 중성문을 만난다. 중성문 문루에 올라 한층 가까워진 노적봉을 감상하고 나면 노적사에 거의 다 왔다.

◇잊혀진 역사, 석사자는 기억할까=노적사 입구의 문루를 통과하면 노적봉 아래 아늑하게 자리한 노적사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전각들은 대부분 1977년 종후스님의 부임 이후 대대적으로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조성되었다. 1960년에 지어진 대웅전 건물은 지금은 극락적으로 변하였다. 지금의 대웅전은 원래 적멸보궁으로 건립되었지만, 현재는 대웅전으로 현판을 바꾸었다. 적멸보궁이 지어지면서 석축 아래 위치했던 대웅전을 없애고 이곳의 아미타불상, 대세지보살상, 관세음보살상을 고양시역사박물관에 기탁하였다. 하지만 이후 적멸보궁을 다시 대웅전으로 바꾸면서 새롭게 석가모니불, 보현보살 그리고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다.

노적봉과 대웅전. 사진=김지영
노적봉과 대웅전. 사진=김지영

대웅전 앞 계단에는 양쪽에 코끼리와 사자상이 있다. 좌측의 코끼리상은 근래 조성된 것 같지만 우측의 사자상은 제법 오래되어 보인다. 입간판 설명에 의하면 사자상은 원래 사찰 입구인 백운동 계곡에 있었으나 1970년대 북한산의 군장병에게 발견되어 노적사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사자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고 있고 표정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이 어려워 해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등에는 안장과 좌대가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수동자를 태웠을 것인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노적봉 아래 자리한 노적사 전경. 사진=김지영
노적봉 아래 자리한 노적사 전경. 사진=김지영

석사자상은 고양지역 유일의 석사자상이기도 하고, 사자상의 조각수법과 양식, 크기 등으로 미루어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이어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곳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이다 보니, 어쩌면 노적사의 역사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김지영 헤리티지포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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