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남지 않은 헐거운 달력을 바라본다. 뭘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 듯 후회 내지는 허망한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이 이상치 않았고, 얼른 새해를 맞아 빨리빨리 시간이 지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정부에서 외국처럼 만 나이로 한 살 줄여준다는 혜택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연배가 되어 감흥이 없고 화살처럼 번개처럼 빠르게 지나 어떤 결실이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고나 할까.
탄탄한 필모를 갖춘 한 배우의 자살이 해를 넘겨도 식지 않고 있다. 억울한 변명을 뒤로한 채, 죽음으로 대변한 먹먹한 마지막 순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툼하고 느끼한 음성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떠나고 들으니 감미롭게 들렸다. 죽음 앞에서 등 뒤에 있던 이들은 그의 진심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그가 살았던 세월만큼이나 남았을 아까운 生을 휴지통에 구겨 버렸지만 유튜브에선 생전 방송들로 월드스타로서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해 주고 애석해하는 팬덤이 생겨 다행이다. 기억에 남아있으면 살아있는 거란 말을 난 추종 한다. 이유 없는 비호감을 가졌던 게 미안해서 남겨진 영화 속 그를 다시 찾아보고 있다.
극 중에서 자책으로 힘들어하는 이에게 해주던 위로의 대사가 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연기로서 한 말이지만 그 말은 드라마를 보던 누구에게나 위안이 되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아무 일도 아니라고 위로하던 그의 무게감 있는 음성이 스스로에겐 적용되지 못해 무척 안타깝다.
프랑스 국제 영화제에서 고인의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갸륵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의 고른 치아로 환하게 웃으며 ‘봉골레 파스타’를 주문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자신의 엉켜버린 삶을 책임지려 아득히 먼 곳을 택했지만 아무 일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인간의 무너짐을 보며 나의 만연한 안락을 정돈한다. 살아갈 방향에 고인 물은 없는지, 지나친 테두리를 떼어내야 할 때는 아닌지도. 거슬리는 주변의 일들을 탓하지 말기로 약조하고도 번번이 미끄러운 마음이 문제다. 흠결 없는 인생은 없다. 언제까지인지 모를 하루를 당연히 맞고 있지만 새벽에 눈을 뜨면 촘촘한 알고리즘의 정도를 지키려는 독자적인 생각은 짙다. 어떻게 살아도 일생이라 했다. 낡아가는 육신을 덮기 위해 달달한 빛깔을 입혀야겠다.
이경선 수필가
2006년 한국문인 등단
한국수필 올해의 작가상, 경기도문학상, 백봉문학상 등 수상
수필집 ‘시선 끝에 마주친 곡선’ 外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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