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미수’에 그쳤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우리는 다시 무력이 지배하는 과거의 어두운 시대로 되돌아갈 뻔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화나 민주주의는 ‘기정사실’이 아니다.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기에, 깨어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깨어 지키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단순한 수혜자로 남아서는 안 되고,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기여하고 투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짧은 시간에도 많은 시민이 국회로 가서 군인의 접근을 막았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들은 상처 입을 것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민주주의를 지켰던 투사요 영웅이며 의인이었다. 그분들 덕분에 오늘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강함은 무력과 폭력과 같은 강함이 아닌 의식, 양심, 참여, 연대, 깨어 있음으로서의 강함이다.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우리 민족은 큰 위기에 처해있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이 위기가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의 영웅적 노력과 희생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가 굳건히 설 수 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일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국민이 분열되고 갈등이 심화하며, 대화와 화합이 아닌 대립과 싸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싸우지 말고 서로 합의하며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된다. 어떤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폭력을 가했을 때 중립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서로 화해하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언일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 과정에서 화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가수 나훈아 씨가 은퇴 공연에서 "왼쪽이 오른쪽을 보고 잘못했다고 생난리입니다. 니는 잘했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싸움을 멈추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화해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자칫 문제의 핵심을 흐리는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 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그 문제는 어떻게 비롯되었으며, 어떤 해결책이어야 하는가?
가톨릭교회에는 ‘진리의 위계’라는 원칙이 있다. 모든 진리가 동등한 것이 아니라 위계가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진리가 성모 마리아 공경에 관한 진리와 동급일 수 없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 각 정당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셈법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당략에 따른 부차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어지러워진 시국을 진정시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 집중할 때 비록 생각이 다르지만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국민이 바라는 방향일 것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의 장인(匠人)이 필요한 때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혹은 힘의 균형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찾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평화를 만들기 위한 장인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장인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평화는 무력이 아닌 대화와 경청, 신뢰에서 비롯한다.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자식 때문에 싸움을 멈추고 집안일을 돌본다. 정쟁을 그만두고 상처 입은 국민을 위해 지금 시점의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서양의 민주주의와 분명 다르다.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해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그 자리에서 민주주의를 삶으로써,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움으로써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 지금과 같이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점에, 우리 후손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리만의 고유한 민주주의가 창출되도록 국민이 한마음으로 모여 힘을 합쳐야 할 때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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