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라는 책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예정된 죽음’을 하루 앞둔 한 말기암 환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암으로 극심한 통증을 받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이루어질 ‘조력사망’을 택한 당사자에게, 고통을 마감하는 순간인 내일은 오늘과 너무 멀게 느껴진 듯하다. 그만큼 고통이 컸으리라. 이 책은 안락사(조력사)에 대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며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로 초대한다.
말기암 환자의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릴 수 없을 엄청난 고통이다. 필자는 모친의 마지막 날을 함께 하면서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였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이제 더는 매달릴 것이 없어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 시작된다. 육신의 고통을 마약성 진통제로, 마음의 괴로움을 우울증 치료제와 수면제로 견뎌야 하는 마지막 시간은 환자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임에 분명하다. 그때 우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문득 프랑스에서 루게릭병으로 생을 마감하신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을 떠올린다. 루게릭병은 말기암 환자와는 또 다른 고통을 준다. 병이 진행될 때마다 느끼는 화상을 입는 듯한 고통뿐 아니라, 멀쩡한 정신으로 조금씩 굳어가는 육신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큰 괴로움일 것이다. 한 번쯤 자살을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카이오 신부님은 인간적인 어려움도 겪으셨지만 다가오는 죽음을 용기를 갖고 마주하셨다. 필자는 물었다. 더는 가망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남의 손에 의지해야 할 때, 남은 삶의 의미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력사를 택한 당사자와 가족에게 공감이 가면서도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남는 이유는, 그러한 선택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반대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말기암 환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결국은 마주해야 할 문제다. 병으로든 노환으로든 더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상황에 우리 모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는 ‘희망’의 문제가 담겨 있다. 인간은 희망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 죽음 앞의 시간이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이유는 내일의 희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력사를 택한 이에게 자신이 원할 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희망이 되었다고 책은 말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희망인지는 의문이다. 진정한 희망은 죽음 너머로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릴 때 주어지지 않을까.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죽음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그 희망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조문 후에 유가족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한 말만이 아닌, 죽었으니 모든 게 끝이 아니라, 고인께서 좋은 세상으로 가시길 기원하며 유가족에게 희망을 전하는 말이다.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기원하며 유가족과 같은 희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 너머의 희망이 조금 더 분명히 나타날 때, 우리는 죽음 앞의 시간을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희망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보살펴주신 하느님께 두는 희망이라면,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님,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지인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희망이라면, 지금 남아 있는 시간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과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소중한 조상님과 부모님, 가족과 지인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괴로움과 환희가 뒤섞여 있는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화해하며 관계를 정리할 축복된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필자가 호스피스 병원에서 모친과 마지막 날을 함께 하며 경험한 것이다.
물론 이는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곁에 있는 가족과 지인의 위로와 격려,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이 길을 걸어갈 것이기에, 우리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가신 분들이 계시기에,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이 모두가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속하는 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 차례가 되었을 때 우리의 마지막을 용기 있게 마주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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