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이 인류 전체를 대표한다. 그는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인 동시에 ‘전부’가 된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자기만의 특성을 보이지만, 그는 동시에 인류의 모든 특징을 한 몸에 지닌 존재가 된다. 개체적 존재로서 한 사람의 인격은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지니는 특이성을 나타내며, 또한 그것에 의하여 그가 규정된다. 인격, 사람됨, 그리고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조건에 의하여 우선 이해되어야 한다.

고대 사회에서 개인은 공동체 일부로서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고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사회적 계급이나 신분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주어졌다. 노예제도는 개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중세 사회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으므로 개인은 신의 피조물로서 의미가 있었다. 개인의 구원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고, 현세보다 내세의 삶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의 영향으로 발생한 근대 운동인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인간의 진보적 가치와 과학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를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이 지향했다.

현대에 와서 개인에 대한 이해를 이전 시대와 다르게 규정하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적 다원주의를 꼽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다양성은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크게 존중받게 되었다.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성별, 인종, 문화,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요소와 함께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미셸 푸코는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분석하며, 개인이 사회적 규범과 권력 구조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심도 있게 탐구했다. 그는 개인이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고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다. 실존주의는 개인이 사회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며,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라고 주장해 개인의 존재의미를 고양시켰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인간 소외에서 찾았던 에릭 프롬은 개인의 ‘소유 양식’에서 ‘존재 양식’으로 전환하는 진정한 자아실현의 이상을 추구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어느 때보다 존중되고 선호하는 시대이지만, 개인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하므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니체가 초인 사상을 통해 시대적 부조리를 극복하려고 했지만, 그 역시 지나친 자기애와 이타적 사랑 사이의 관계를 해결되지 않은 ‘이율배반(二律背反)’으로 남겨놓았다. 한 인간으로서 개인이 아무리 자상하고 고결하며 위대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이기적 자기 사랑으로 점철된 개인주의는 일종의 역병이라고 일갈했던 장 칼뱅의 중세적 관찰은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진리다.

타자성을 추방하는 개인주의에 대한 찬양은 결국 미래도 없고, 진정한 연대도 사라진 깊은 무기력에 빠진 사회를 만들 뿐이다. 획일적인 삶의 방식은 고유성의 부재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것에 ‘같게 하기’를 문화 또는 정치적으로 강요한다면, 거기에는 진정한 현존재(Da-sein) 대신 자기 소외만 자리한다. 익숙한 이해 지평의 붕괴는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역설적으로 그 두려움 속에서 비로소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진정한 고유성은 일상성의 붕괴, 즉 안정화하는 세인(das Man)의 세계로부터 적극적으로 떨어져 나가려는 시도로 인해 익숙함이라는 바깥에 존재하는 섬뜩함에 직면한다. 그것이 개인의 진정한 가치가 발현되는 지점이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 소비이자 자기 죽음일 수 있다. 이것을 한병철은 "죽음은 자신으로 존재하기에 탁월한 가능성"이라고 말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것이므로, 나는 가장 고유한 자아로서 존재하게 된다. 고유한 자기 존재를 향한 과묵하고도 두려움을 불사하는 결단성이 전제되지 않는 개인의 의미와 가치는 자기 포기, 자기 죽음을 현존재로 끌어들일 뿐이다.

우리 시대가 같은 것의 테러가 모든 곳으로 번지는, 타자의 부정성이 창궐하는 시대에 서 있는 것 같다. 성서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을 바르고 온전하게 사랑하는 태도가 곧 내가 사랑해야 할 또 다른 사람들에게서 예외 없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함의한다. 사랑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성서의 예수가 묻는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비로소 발현된다. 같은 것의 긍정성 역시 밀려나는 시대에, 차이를 긍정하며 조정하므로 동일자의 밀도 있는 본성, 즉 진정한 인간의 존재 조건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비록 경험의 본질이 고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차종관 세움교회 목사, 전 성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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