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긴 하루를 마치고 조용히 건물을 나선다. 법복을 벗고, 무거운 결정을 내려놓은 채 담담히 걸음을 옮긴다. 익숙하고 고요한 발걸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는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 헌정사상 유례없는 탄핵 심판을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끌어낸 인물이다.

언론은 그의 이름을 머리기사로 올렸고, 여론은 그의 표정을 확대해 해석했지만, 그는 끝까지 말을 아꼈다. 판결 후에도 담담히 자리를 떠났고, 그 뒷모습은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국민은 그의 침묵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무게를 읽었다. 그 절제된 태도와 단단한 품격은 자연스레 그의 스승, 김장하 선생을 떠오르게 한다. 김장하 선생은 평생 한약방을 운영하며 교육과 인권운동을 조용히 후원했던 분이다. 직함도, 명성도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도움을 주었고, 드러나기보다 물러섰다. 이름보다 삶을, 명예보다 방향을 중시했던 그의 행보는 문형배의 태도 속에 고스란히 이어졌다. 말보다 실천이 앞서고, 존재보다 영향이 깊은 사람. 그런 유산 위에 세워진 조용한 결기였다.

그 조용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최근 본 영화 '승부'도 그러했다. 이창호가 스승 조훈현을 이기고도 고개를 숙이는 장면, 그리고 그 스승이 조용한 미소로 응답하는 장면. 단순한 승패를 넘어선 절제와 품격, 그리고 관계를 지켜내는 존중이 담겨 있었다. 오랜 신뢰가 만들어 낸 풍경, 그것은 곧 우리가 잊기 쉬운 ‘어른다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장면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자문하게 된다. 정치는 어떻게 바뀌고, 사회는 무엇으로 달라지는가. 예전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 속에서 내가 배운 것은 명확하다. 순간의 전략보다 사람의 태도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기발한 해법보다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기준이라고, 상대를 이기기보다 이해하려는 자세, 책임을 남에게 돌리기보다 스스로 감당하려는 용기, 이런 선택들이야말로 공동체를 바꾸는 지속 가능한 힘이며, 그 영향력은 단기적 효과보다 오래 지속된다.

역사 속에서도 그런 품격은 깊은 자국을 남겼다. 모두가 아는 간디는 세상을 향해 걷고, 침묵하고, 단식하고, 저항했지만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고함치지도, 적을 설득하려 언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의 무기는 흔들림 없는 신념이었고, 조용한 실천이었다. 그 걸음이 거대한 제국을 흔들었고, 반복된 행동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절묘한 묘수보다 상수의 실천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믿음은 여기서 비롯된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갈림길에 서 있다. 말보다 감정이 앞서고, 해법보다 구호가 넘치며, 절제보다 과잉이 지배하는 시대. 혼란스러운 이 풍경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속 가능한가. 누구를 따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질문의 방향이 달라지면, 해답도 달라진다.

기술은 눈부시게 진보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우리의 일상과 판단, 심지어 윤리적 결정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자주 묻게 된다. 기술이 제시하는 해답이 언제나 옳은 것일까. 판단과 선택, 방향과 기준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우리가 어떤 자세로 기술을 마주하느냐가, 그것이 만들어 낼 사회의 모양을 결정한다.

그래서 결국, 다시 사람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품격과 내면이 방향을 정한다. 화려한 전략은 눈길을 끌지만, 판을 지탱하는 것은 기본기다. 절제된 자세, 책임을 다하려는 마음, 설명을 피하지 않는 정직함 등 이것이야말로 첨단 시대에 우리가 놓쳐선 안 될 인간의 본질이다.

바둑판 위에 흑과 백이 얽히듯, 세상도 그렇게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로는 흑이 밀리는 듯 보여도, 단 한 수가 형세를 뒤집는다. 기술이 백이라면, 품성은 흑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돌이 결국 승부를 바꾼다. 지금, 우리가 둘 차례다.

말보다 삶으로 보여준 어른 김장하처럼, 결국 그런 사람이 길이 된다. 그 분의 걸음을 생각하며, 이번 주 AX 수업에서 이렇게 전하고 싶다.

"기술은 진보하지만, 태도는 사람을 남긴다"라고 말이다.

김형태 성균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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