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남양주 마재성지

성가정 마재성지 도마성전의 모습. 사진=박찬희
성가정 마재성지 도마성전의 모습. 사진=박찬희

한강이 휘감아 도는 곳에 자리 잡은 남양주. 남양주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강변 풍경이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다산생태공원은 늘 사람들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공원 앞으로 드넓은 한강이 펼쳐지고 뒤로는 유서 깊은 정약용유적지가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두 곳만 기억하기에는 못내 아쉽다. 정약용 집안은 조선의 대표적인 천주교 집안으로 정약용 집안을 빼놓고 천주교의 역사를 말하기 어렵다. 정약용도 한때 천주교 신자였으며 이 일로 반대파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오랜 세월 귀양을 떠났다.

정약용 형제 가운데 기억해야할 인물이 정약용의 형 정약종이다. 동생인 정약용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그는 천주교의 역사에서 큰 자취를 남겼다. 정약종 집안은 본인뿐만 아니라 부인과 자식들까지 죽음으로 믿음을 지켰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씨 형제들과 대를 이어 순교한 정약종 가족을 기리며 만든 곳이 성가정 마재성지다.

도마성전 옆에 위치한 명례방. 사진=박찬희
도마성전 옆에 위치한 명례방. 사진=박찬희

◇역경에서도 믿음 지킨 정약종 가족=정씨 형제의 고향은 마재마을이다. 이곳으로 들어가기 전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그 마을 끝자락에 마재성지가 자리 잡았다. 마재성지는 크고 웅장한 건물이 없어 조용한 시골 마을과 잘 어울린다. ‘성가정 마재성지’라는 표지판이 없으면 잘 가꾼 집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성지는 크기로 권위를 내세우는 대신 자세를 낮춰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건넨다.

아름다운 꽃담을 따라가면 성전이 나온다. 성전은 크고 우람한 성당이 아니라 한옥으로 지은 아담한 건물이다. 성전 앞에는 툇마루가 달려 지친 다리를 쉬기에 안성맞춤이다. 툇마루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면 종교에 상관없이 환대받는 기분이 든다.

따뜻해진 마음으로 도마성전으로 들어간다. 성전 안은 천장도, 벽도, 의자도 모두 나무다. 나무의 물결을 이루는 성전 안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성전 안 예수님은 한복을 입었다.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전해졌을 때 한옥에서 예배를 보았다는 걸 떠올리면 한옥 성전과 한복 입은 예수님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정약종 가족의 모습을 그린 ‘마재의 성가정’. 사진=박찬희
정약종 가족의 모습을 그린 ‘마재의 성가정’. 사진=박찬희

도마성전 옆으로 건물이 이어졌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정약종 가족의 초상화를 보기도 하고 차를 마시며 쉬기도 하는 명례방이다. 명례방은 어디에서 유래한 이름일까? 1784년 중국에서 돌아온 이승훈은 한양의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이벽, 정약용, 권철신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 천주교 활동이 늘어나면서 활동 장소도 김범우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 집이 있던 곳이 명례방으로 지금의 명동성당 근처다. 명례방이란 이름은 천주교 초기 역사에서 무척 중요했다.

명례방 안으로 들어가면 성가족을 이룬 정약종 가족의 초상화가 걸렸다. 가장 먼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정약종 가족의 그림인 ‘마재의 성가정’이 보이고 그 뒤로 정약종 가족의 개인별 초상화가 늘어섰다. 정약종은 1786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굳건하게 믿음을 유지했다.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를 이끌었고 교리를 깊이 연구했다. 1801년 정조가 승하한 후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대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고 첫째 아들 정철상도 그 뒤를 따랐다.

성 정하상 바오로 묵주. 사진=박찬희
성 정하상 바오로 묵주. 사진=박찬희

정약종의 남은 가족도 온갖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특히 둘째 아들 정하상은 천주교의 확산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했다. 직접 중국으로 들어가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뜻이 로마 교황청까지 전해져 마침내 조선 교구가 만들어졌다. 조선에 선교사가 파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이었다. 정하상은 천주교의 발전을 위해 애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었다.

남아있던 가족도 박해를 피하지 못했다. 정약종의 아내인 유조이는 79세의 고령으로 문초를 받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딸인 정정혜 역시 아버지와 오빠들의 뒤를 따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지금 정약종 가족은 한 폭의 그림에 평화롭게 모여 명례방을 찾는 우리들에게 포근한 미소를 전한다.

예수님의 발. 사진=박찬희
예수님의 발. 사진=박찬희

명례방에서 나오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봄을 알리는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성지를 화사하게 물들인다. 성지를 내딛는 걸음걸음이 충만한 건 단지 봄바람이나 봄꽃 때문만은 아니다.

길 건너편 산기슭으로 잘 가꿔진 길이 나타난다. 예수님이 간 마지막 길을 따라가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성지 순례를 온 신자들은 십자가마다 멈춰서 경건하게 예배를 드린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천천히 이 길을 걸으며 순교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좋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못자국이 선명한 예수님의 두 발이 놓였다. 이 발을 잡고 고백문인 사도신경을 암송하라고 만들었다고 한다.
 

다산문화관. 사진=박찬희
다산문화관. 사진=박찬희

◇‘거인’ 정약용 발자취 따라=포근한 마음을 안고 마재성지를 떠난다. 나지막한 고갯길을 내려가면 마재마을에 다다른다. 마을에서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건 정약용유적지다. 이곳에는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정약용을 기리는 사당인 문도사, 여유당, 정약용의 무덤, 실학박물관이 자리 잡았다. 모두 정약용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먼저 다산문화관에 들린다. 이곳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체험 코너, 옷 입어보기, 퍼즐 맞추기, 엽서 쓰기, 그림 그리기, 굿즈 자판기가 마련됐다. 다산기념관에서는 정약용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전시물 가운데 하피첩과 ‘매화병제도’ 사진 앞에서 발길이 머문다. 원본도 아닌 사진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뭘까?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정약용은 오랫동안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마침 부인이 혼례 때 입은 분홍치마를 보내왔다. 정약용은 치마를 잘라 책을 만들어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썼다. 그는 무엇보다 근면하고 성실할 것을 당부했다. 근면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아침에 할 일을 오후로 미루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다. 이 책이 하피첩으로 모두 네 권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세 권만 전한다.

하피첩을 만든 지 삼년 후 딸이 혼례를 치렀다. 유배지를 떠날 수 없는 정약용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쓰고 남은 부인의 치마 조각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써 딸에게 주었다. 이것이 ‘매화병제도’다. 혼례를 치르는 딸이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치마 조각에 오롯이 담겼다. 하피첩과 그림에서 위대한 학자가 아닌 그저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던 평범한 아버지를 만난다.

정약용의 집 ‘여유당’. 사진=박찬희
정약용의 집 ‘여유당’. 사진=박찬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해라."

정약용이 집 이름을 여유당(與猶堂)으로 지은 이유다. 당시 살얼음판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힘없는 가문이 살아남으려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했다. 집 이름까지 이렇게 지었건만 정약용은 정치의 파도를 이겨내지 못했다.

정약용 묘소. 사진=박찬희
정약용 묘소. 사진=박찬희

여유당 뒤편 언덕에 정약용의 무덤이 자리 잡았다. 무덤으로 오르기 전 안내판에 소개된 정약용이 스스로 지은 묘지명을 읽으면 도움이 된다. 묘지명에서 정약용이 말하는 정약용을 만난다. 그는 "그 사람됨이 선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했으니 운명이다"라며 유배를 떠난 일을 기록했다.

‘운명이다’라는 말의 무게와 깊이를 헤아리며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무덤 앞이다. 무덤 앞으로 여유당과 마재마을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한강이 유유히 흐른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자 했던 거인 정약용을 떠올리다 무덤을 내려온다.

실학박물관 전경. 사진=박찬희
실학박물관 전경. 사진=박찬희

하얀 목련이 활짝 핀 정약용유적지를 나와 실학박물관으로 향한다. 조선 후기 역사를 수놓던 실학자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전시실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실학의 흐름이 그려진다. 실학자들은 현실에서 멀어진 학문 대신 현실에 바탕을 둔 쓸모 있는 학문을 추구했다. 정약용은 대표적인 실학자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다양한 대책을 제시했다. 현실을 직시하려는 실학자들의 태도는 조선 후기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효하다.

다산생태공원 전망대에서 본 한강. 사진=박찬희
다산생태공원 전망대에서 본 한강. 사진=박찬희

실학박물관에서 한강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다산생태공원이 나온다. 한강변에 만든 공원으로 한강을 보는 눈 맛이 시원하다. 나무 사이로 편안한 길이 났고 중간 중간 의자가 놓여 지친 다리를 쉬기 좋다. 공원을 걷다보면 답답한 속이 뻥 뚫린다. 정약종과 정약용도 답답할 때면 이곳을 걸으며 마음 속 체증을 가라앉혔을지 모른다.

어딘지 그들의 삶은 한강을 닮았다. 수많은 물줄기를 품에 안고 끝내 넓은 바다로 가고야 마는 거대한 한강을.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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