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화성 남양성모성지
경기도 화성은 대한민국에서 인구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도시 중 하나다. 2001년 군에서 시로 승격된 이후 2023년 인구 100만을 돌파하며 올해 ‘특례시’로 지정됐다. 그러나 화성특례시는 단지 역동적인 도시 발전의 상징만은 아니다. 이곳에는 3·1운동 순국지인 제암리교회 터가 있고, 병인박해 때 이름 없이 순교한 수많은 신자들의 흔적이 깃든 남양리 천주교 성지가 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향하던 길목에서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은 장소이기도 하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자신도 곁에 묻히며 효심의 유산을 남겼다. 급변하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은 조용히 화성에 머문다.
◇순교의 기억, 그리고 그 시작=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가 시베리아 동부를 점령했다.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된 러시아는 1864년과 1865년, 조선에 수차례 통상을 요구했고, 이에 대응해 흥선대원군은 당시 천주교 신자였던 도승지 남종삼을 통해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 러시아 견제를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베르뇌 주교와의 회동이 추진됐으나, 1866년 1월 서울에 도착한 주교 일행은 끝내 만남에 실패했고, 2월에는 주교가 체포되며 병인박해가 시작된다.
이 박해는 1871년까지 이어졌고, 선교사 9명을 포함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돼 화성, 공주, 해미 등지에서 고문과 처형을 당했다. 희생자는 약 2만여 명에 달하지만, 대부분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무명의 순교자들이었다. 화성 남양성모성지는 바로 이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다.
남양은 과거 남양부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서해안 지역 군사·행정의 요충지였다. 게다가 남양은 지리적으로도 당시 신앙활동이 자유로웠던 중국과 연락이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으로 몰려 들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되는 남양부사는 경기도 관찰사의 감독을 받으며 많은 행정권한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재판과 형벌의 집행권도 가지고 있었기에, 주변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남양으로 끌려와 순교하기도 했다. 그렇게 순교한 순교자 중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충청도 내포 출신의 김 필립보·박 마리아 부부, 용인 출신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출신 김홍서 토마 등 네 명뿐이다.
김 필립보·박 마리아 부부는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전교활동에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사제의 공소 방문시 성무를 돕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병인박해 당시 숨어지내다 1868년 남양에 끌려와 옥고 끝에 순교했다. 정 필립보는 김 필립보 부부보다 1년 먼저 남양에 붙잡혀 와 가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으며, 아내와 함께 잡혀왔던 김홍서 토마는 아내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3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들 네 사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지만, 이곳 남양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다른 지역 순교지와 달리 무명인 사람이 많아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못했다.
◇100년 만에 되살린 순교의 기억=순교자들의 피가 서린 장소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졌다. 오랜 세월 잊혀졌던 이 장소는 1983년을 전후해 성역화되기 시작했다. 지역 향토사학자들과 연구자들이 병인박해 현장이었음을 밝혀낸 이후, 천주교 수원교구는 1991년 이곳을 공식적으로 ‘남양순교성지’이자 ‘성모성지’로 선포했다. 특히 남양성모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된 곳으로, 지금도 우리나라 유일의 성모 성지로 존재하고 있다.
성지 선포 이후 30여 년 동안 화성 남양읍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수원교구 이상각 신부의 주도로 성지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성모상과 그리스도상, 십자가의 길, 그리고 중심이 되는 대성당 건립이 구상됐다. 수차례의 설계 논의를 거쳐 2011년, 스위스의 세계적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대성당 설계를 맡는다. 7년에 걸친 치밀한 설계 끝에 탄생한 이 대성당은 단지 종교 건축을 넘어, 영적인 경험의 공간을 창출하려는 시도였다.
보타는 가톨릭 성당뿐만 아니라 이슬람 사원까지 다양한 종교건축을 설계해온 인물이다. 그는 이곳을 통해 박해의 아픔이 깃든 자리를, 믿음과 인간 존엄의 상징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영감은 성지를 ‘마음의 치유처’로 꿈꾸던 이상각 신부에게서 비롯됐다.
성지의 입구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면, 아담한 초봉헌소를 지나 언덕 정상에 두 개의 붉은 원기둥이 우뚝 솟은 대성당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계곡 깊숙이 자리한 이 대성당 건물은 주변의 녹음과 대비돼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모습은 마치 "여기서 평화를 찾으라"고 속삭이는 듯하는 느낌을 준다.
대성당은 극도로 단순한 직선과 곡선으로 구성돼 원시적 숭고함을 담아내고 있다. 외부의 상징성이 강한 십자가조차 절제돼 타워 꼭대기에 작게 배치됐고, 천장은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돼 내부 공간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다. 내부 마감은 목재로 처리돼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제단 위에는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그린 성화가 걸려 있는데, 등장인물들의 동양적인 이목구비가 인상적이다.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의 작품이다.
또한, 음향환경 역시 과학적으로 설계됐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 시 그 울림이 더욱 풍부하게 느껴지도록 설계됐다고 한다.
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십자가의 길’이 이어진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묵주알 위에 조각된 예수의 수난 장면들이 길 양옆을 따라 배치돼 있고, 그 끝에는 성모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떠안고 있는 조각상이 자리한다. 단순한 산책길이 아닌, 깊은 묵상의 순례길이다.
성지 입구에 거의 공사가 끝나가는 듯한 긴 건축물은 ‘성요셉 엔드리스 예술원’이다.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Endless Column’에서 영감을 받은 이 공간은 문화와 예술이 함께하는 복합 성지로써 기능할 예정이다.
◇현재진행형, 누구나의 성지= 남양성모성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 중인 ‘순교자의 언덕’은 단순한 묘역을 넘어, 공간의 흐름 속에서 순교의 의미를 되새기고 누구나 다시 태어남을 느끼게 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구상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현대 건축의 거장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티하우스’ 또한 성지에 새로운 지평을 더할 예정이다.
남양성모성지는 자연과 건축이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신성과 숭고함을 조용히 경험하게 한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이곳은 복잡한 세속에서 벗어나 고요한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성지란 결국, 누군가의 마음이 머물고 다시 깨어나는 그 자리일지도 모른다.
김지영 헤리티지포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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