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감 있지만 정든 물건이에요. 1층 아파트 정문에서 직거래 원합니다." 당근마켓에 올린 글을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적는다. 어느새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를 말해주는 문장이 되어 있었다. 짐을 정리하며 상자 하나를 열었을 때, 순간 멈칫했다. 골동품이 되어버린 주인 잃은 휴대폰들, 배터리가 방전된 MP3 플레이어, 여행지에서 하나둘 모았던 기념품들,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다시 손을 놓았다. 그렇게 작은 물건 하나에도 시간이 묻어나 있고, 기억이 묻어 있다. 한때는 손에서 떼지 않고 사용하던 것들이 이제는 존재만으로 내 삶의 한 페이지를 증명한다. 평소엔 무심히 지나쳤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쓰다듬듯 바라보게 된다. 마치 떠나는 내가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말이다.

오십 년 만의 이사다. 서울 용산의 시장 골목에서, 부모님 손에 이끌려 화성을 지나 수원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반백 년을 살았다. 당시엔 잠깐 머물다 떠날 줄 알았지만 어느새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깊은 한 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플라타너스가 즐비한 익숙한 골목, 딸아이를 낳고 키웠던 사십 년을 훌쩍 넘긴 재건축을 시작한 수원의 첫 고층 아파트 ‘한신아파트’, 그 풍경 앞에 서면 문득 "이곳이 나의 살던 고향이었지?"라는 생각에 잠긴다. 어찌보면 고향이 되어버린 수원이 참 고맙다. 청춘을 보낸 이곳 사람들의 온기와 도시의 풍경이 차곡차곡 나를 길들였다.

"다인 아빠는 연예인 해도 되겠어." 늘 그렇게 농담을 던지며 사진을 인화해주던 한신사진관 찍사 형님, 잊을 수 없는 한결같은 맛으로 돈까스를 만들어주셨던 종렬 형님, 비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쫄망쫄망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주던 딸, 원천유원지의 흐드러진 벚꽃길, 광교산 자락의 새벽 공기까지 수원은 어느덧 나를 만들어 준 도시가 되어 있었다.

짐을 정리하다 문득 EBS 다큐멘터리 ‘건축탐구-집’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느 출연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편히 숨 쉴 수 있는 곳, 상처를 드러내도 괜찮은 곳."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이번 이사는 단순히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 ‘이제 어떤 숨을 쉬며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새로 이사할 곳은 서울숲이 가까운 성수동이다. 나무 냄새가 나는 길을 걸으며 한강까지 이어지는 산책로, 멀지 않은 거리에서 들리는 지하철 소리와 자동차의 분주한 기척, 자연과 도시가 나란히 걷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다시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시작해보려 한다.

그 긴 세월을 함께 버텨준 까사미아 거실장은 이번에도 결국 함께 가기로 했다. 30년을 같이 살아낸 가구는 더는 ‘물건’이 아니다. 말하자면 나의 ‘시간 저장소’ 같은 존재다. 나이가 들수록, ‘사는 곳’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나를 닮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엔 그저 넓고 편한 곳이면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의 끝에서 나를 회복시켜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친구야, 미안하다. "조만간 같이 시골로 내려가 텃밭에 토마토 심고, 고추심고, 책이나 쓰며 살 거 아니었냐?"는 그의 농담에 웃으며 답했지만, 결국 나는 서울을 택했다. 복잡하지만 여전히 꿈틀대는 도시의 기운이 나를 아직도 쓰고 싶게 만든다. 나의 다음 시절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당분간 그 무대는 서울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유난히 창문으로 스며든 오후 햇살이 바닥에 길게 드리웠다. "잘 살았다"는 말은 결국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떠나며 웃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

이제 나는 다시,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아 떠난다. 그곳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나를 키워볼 생각이다. 서울 한복판, 숲이 있는 동네에서 새로운 계절처럼 말이다.

김형태 성균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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