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화성 용주사
지난 5월 5일은 양력 어린이날과 음력 부처님 오신 날이 겹치는 날이었다. 이래저래 경사스런 날이다. 이런 날 화성 용주사의 봉축법요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했다. 법요식은 아침 10시부터 시작이라 길이 막히고 진입이 어려울 것을 예상해 9시쯤 도착하게 방문했지만, 이미 수많은 인파가 용주사로 모여들고 있었다. 종교계는 최근 종교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 많은데, 최소한 부처님 오신 날의 용주사만큼은 그런 걱정을 무색케 할만큼 많은 분들이 절을 찾았다.
◇정조가 효심으로 세운 용주사=많은 경우 사찰의 창건연대를 최대한 올려보려고 하지만, 용주사는 조선 후기인 1790년에 창건된 것을 숨기지 않는다. 조선에서 세종대왕과 함께 손꼽히는 명군인 정조가 직접 진두지휘해 건설한 사찰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자랑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원래는 ‘갈양사’라는 절이 있던 터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은 굳이 강조하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용주사는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세운 절이다. 정조는 이 절을 세우고는 밤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꿨는데, 이것이 곧 아버지 사도세자가 한을 풀고 승천한 것을 뜻한다고 풀이하고는 절의 이름을 용의 구슬이라는 뜻의 ‘용주사’로 지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용주사는 효행사찰을 표방한다. 사실 불교가 이전부터 계속 비난을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유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충효인데, 불교는 이 둘을 모두 부정한다고 인식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승병들이 일어나 전쟁에 참여하면서 더이상 불교는 ‘충’이 없는 종교가 아니게 됐다.
그리고 정조가 이처럼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절을 세우고 ‘부모은중경’이라는 효를 강조한 불경을 간행함으로써 불교와 효의 관계는 더 확실히 정립될 수 있었다. ‘부모은중경’은 이미 고려말에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세종 때에도 목판이 만들어졌지만, 이를 기리고 ‘효행’을 강조한 사찰은 용주사가 유일하다. 정조가 간행을 주도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아마도 김홍도가 이 경전의 변상도를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면서 더욱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구름 속 용 조화부리듯 부처님 설법 전하다=용주사의 정문격인 천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큰 건물이 바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효행박물관이다. 정조가 간행한 부모은중경은 목판, 동판, 석판으로 구성돼 있는데, 현존하는 여러 부모은중경 판본 중에서 용주사 판본은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그림이 아름다우며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용주사만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효행박물관 앞에서는 부모은중경 목판 인경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마치 생일을 맞아 태어난 사람에게 축하가 집중되지만, 사실 그날 가장 고생한 어머니에 대한 감사도 잊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처럼,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왕비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물론 경전에 의하면 마야왕비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부처님을 낳으셨기는 하지만.
이 체험 행사장 앞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또 하나 보인다. 바로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원래 유교 의례공간에 있어 신성한 곳의 입구에 세워지는 특징적인 문이다. 보통 사찰에 이러한 문이 세워져 있다는 것은 왕실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용주사 역시 사도세자를 위한 사찰이고, 또 정조가 직접 지시해 세운 사찰이기 때문에 이런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 홍살문의 기원도 원래는 불교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인도의 스투파(불탑) 입구에 세워지는 ‘토라나’라는 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일주문이 됐는데, 유교에서는 이를 홍살문으로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불교가 유교에 영향을 주었고, 유교는 다시 이것을 불교 사찰에 세웠으니 일종의 역수출이라고나 할까.
홍살문을 지나면 두 번째 문인 ‘삼문각’을 만나게 되는데, 이 문도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말하자면 행랑채처럼 생긴 문이다. 문 옆 좌우로 7칸씩의 방이 길게 늘어선 형식인데, 마치 경복궁으로 들어갈 때 광화문 안쪽으로 두 번째 문인 흥례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보면 용주사는 사찰의 구조와 궁궐의 구조를 결합해 놓은 듯한 형태여서 마치 정조가 이 절을 사도세자를 위한 궁궐로서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삼문각 안쪽 상단에는 ‘용주사’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용(龍)’자는 정말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주(珠)’자는 마치 나무에 여의주가 걸려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글씨와 주련의 글씨는 모두 죽농 안순환(1871~1941)이 쓴 것이다. 네 문장으로 된 주련의 내용은 첫글자만 보면 ‘용주사불(龍珠寺佛)’이 되도록 한 것이 흥미롭다. 그 내용은 "龍蟠華雲(용반화운), 즉 빛나는 구름속에 서린 용이, 珠得造化(주득조화),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네, 寺門法禪(사문법선), 이 절의 법은 선법이니, 佛下濟衆(불하제중), 즉 부처님 오셔서 중생을 제도하시네"로 해석된다. 결국 구름 속에서 용이 신묘한 조화를 부리듯, 이 절 안에서는 부처님의 법이 설해지고 있다는 뜻이겠다.
삼문각을 지나면 오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천보각이 압도하듯이 서있다. 천보각 옆으로도 행랑채가 달려 있어서 이는 경복궁의 세 번째 문인 근정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보통 사찰에서의 누각은 보제루, 우화루, 만세루 등으로 불리는데, 천보루란 이름 역시 드문 것이다. 다만 천보루의 뒷면, 즉 대웅전을 마주한 면에는 홍제루라는 두 번째 현판이 걸려있다. ‘홍제’나 ‘보제’는 모두 크게 건넌다는 뜻으로 사실상 ‘대승(大乘)’을 뜻하는 것이다. 이 천보루 아래를 지나 드디어 용주사의 중심 전각인 대웅보전 앞마당에 이르니 연등이 하늘을 메우고 이미 많은 불자님들이 봉축 법요식을 기다리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피 버스데이 투 붓다"=법요식은 한껏 단장한 두 화동이 천보루 아래에서 꽃을 뿌리며 입장하고, 그 뒤를 이어 용주사의 주지스님인 성효스님을 비롯한 용주사의 여러 스님들과 경기도지사, 화성특례시장, 화성특례시의회 의장 등 정치권 인사들이 나란히 입장하면서 시작됐다. 특히나 성효 주지스님에 대한 용주사 불자님들의 환영은 사뭇 각별한 듯했다. 마치 연예인이 등장했을 때의 환호같은 반응을 보니, 불자님들의 주지스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지는 개회사 및 여러 내빈 소개 등 공식일정에 이어 우아한 전통무용공연이 대웅보전 앞에서 펼쳐졌다. 마치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강림하셨던 길을 따라 관객들을 안내하는 듯한 동작이 인상적이었다. 이어 불단에 연꽃을 올리는 헌화의식에서는 스님 한 분과 내빈 한 분씩 짝을 이뤄 대웅보전 앞에서 법당 안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두 보살에게 연등을 전달하면, 이를 보살님들이 받아 불단 아래 헌화하는 방식으로 엄숙하게 진행됐다.
이 꽃 공양은 불교에서는 큰 의미를 지닌다.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무사들이 단지 밥 한 공기만을 대가로 받고 목숨을 걸고 마을사람들을 위해 싸워줬던 것처럼, 부처님은 이런 꽃 한송이만을 받고도 진리를 설파해주셨기 때문이다. 비록 꽃 한송이일지라도, 얼마나 배움의 자세가 진지한가 하는 것이 중요했던 만큼, 불단에 꽃을 헌화하는 두 분 보살님은 더할나위 없이 진지하고 엄숙했다.
이어지는 행사에서는 용주사 측에서 사회에 공헌한 분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시간 및 사회에서 용주사 불자님들께 상을 수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불교가 사회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경찰, 의용소방대, 문화유산 관리자 등 사찰과 사회의 안전과 유지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분들에 대한 배려가 돋보였다.
이어지는 주지스님의 설법. 주지스님은 이날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처님 ‘오셨던’ 날로 부르셨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이제는 우리 곁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이날은 비로소 부처님이 오시는 날이 아니라, 사실은 2569년쯤 전에 부처님이 오셨던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다. 이어 주지스님은 스스로 긴 설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시며, 대신 3개 국어로 짧게 법문을 하시겠다며 시작했다. 영어로 "해피버스데이 투 붓다"로 시작한 법문은 "흉한 것이 귀하게 되는 것이니 귀천을 함부로 말하지말라. 소리없는 그것이 울리는 것이요, 가만히 미동도 없는 것이 요동치니, 보일락 말락 저것이 광명이었구료"라는 우리말 법문으로 이어졌으며, 끝으로 "일체가 그대로 광명이로구나"라는 뜻의 짧은 일본어로 법문을 마치셨다. 좌중은 이 3개 언어 법문을 듣고는 웃음바다가 됐다. 왜 용주사 불자님들이 주지스님을 연예인 맞이하듯 하는지,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용주사를 찾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법문이었다. 시종일관 좌중을 웃게 하시면서도 진실을 담은 법문을 하시니, 불자님들이 매주 주지스님 설법을 기다리며 한 주를 보내지 않을까 싶었다.
그 뒤로는 합창공연 등에 이어 봉축법요식의 하이라이트인 관욕의식이 이어졌다. 흰 코끼리 위에 서 계신 아기부처님을 목욕시켜 드리는 의식이다. 워낙에 많은 분들이 오셨기 때문에 관욕을 위한 줄은 한참을 이어졌다. 아마도 겉으로는 부처님을 씻겨드리는 것이지만, 누구나 마음으로는 자신의 번뇌를 씻어 없애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부처님 오신 날의 가장 기대되는 것은 점심공양이다. 이날 공양은 비빔밥이었는데, 역시나 이를 받기 위한 줄이 장사진을 이뤘다. 그러나 이 긴 줄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만큼은 특히나 모든 불자님이 하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점심공양은 뒤로 하고 모처럼 용주사를 찾은 김에 다시금 대웅보전에 걸린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후불탱화를 감상했다. 보면 볼수록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불화다. 필자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보지만, 설령 김홍도가 그리지 않았을 수 있다고 치자. 만약 그렇다면 그 화가는 김홍도만큼이나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저녁에는 다시 주지스님 이하 용주사 스님들을 필두로 연등 탑돌이 행사가 이어졌다. 연등이란 무엇인가? 어둠을 밝히는 지혜다. 부처님이 알려주신 가르침을 지금처럼 우리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 지혜의 빛을 이어서 밝히고 있는 스님들 덕분이다. 주지스님 말씀처럼 부처님이 우리 곁에 와계실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용맹정진하고 있는 스님들 덕분이리라.
주수완 우석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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