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의왕지역의 국채보상운동
1904년 러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한국에 차관공세를 폈다. 1907년 2월까지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빚진 외채는 모두 1천300만 원에 달했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만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국민들은 스스로 국채를 갚고 일본의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국채보상운동의 대열에 적극 참여했다. 고위 관료나 양반, 부유층은 물론 노동자·농민들로부터 여성·상인·군인·학생·기생·백정·승려 등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나아가 해외의 유학생과 동포들, 심지어 일부 외국인들도 참여했다. 국채보상을 위한 의연금 또는 의연품을 내놓는 것은 곧 ‘애국(愛國)’이었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은 나라를 잃지 않으려는 국민의 주권수호운동이자 구국운동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은 당시 궁벽한 의왕지역에도 닿았다. 1907년 당시 광주군의 의곡면과 왕륜면, 그리고 광주군 소속이었다가 1906년에 안산군 월곡면으로 편입된 월암동과 일리, 대대동, 그리고 상초평과 하초평이 현재의 의왕지역에 속한다.
국채보상을 위한 의왕지역의 의연금 모금 현황이 언론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황성신문’이다. 1907년 4월 15일 날짜의 신문 3면에 안산군 월곡면 일리동과 대대동 주민들의 의연금 현황이 실렸다. 이어서 ‘대한매일신보’ 4월 17일 4면에 안산군 월곡면 하초평, ‘황성신문’ 5월 8일자에는 월곡면 월암동(月巖洞)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주민과 의연금 내역이 각각 게재됐다.
왕륜면의 국채보상 의연금 모금 상황은, 지역적으로 월곡면에 바로 인접해 있음에도 2개월여가지난 뒤 대한매일신보에서 확인된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4일 4면에 왕륜면(旺倫面) 이리(二里), 7월 12일에 왕륜면 일리(一里), 7월 18일에 왕륜면 삼리(三里) 상장의(上壯義) 주민들의 국채보상 의연금 내역이 각각 실렸다. 안타깝게도 의곡면 지역(지금의 의왕시 내손동, 포일동, 청계동, 학의동)의 국채보상 의연금 모금 현황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1907년 3월부터 8월까지 사이에 확인된 의왕지역 국채보상운동 참여 지역의 주민들과 의연금 모금 현황을 보면, 참여자 338명에 의연금 총액은 63원 11전 및 425냥이었다.
현재의 의왕지역에 해당하는 당시의 광주군 왕륜면 일리, 이리 및 삼리와 안산군 월곡면 월암리(월암동, 일리동, 대대동) 및 초평리(상초평, 하초평)는 동족마을로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주민 대부분이 영세한 농민들로 소작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왕지역 국채보상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각 마을에서 공동체를 형성해 생활하는 같은 문중의 주민 참여가 두드러진다. 오전동의 전주이씨·문화유씨, 왕곡동의 청풍김씨, 고천동의 함양박씨·전주이씨, 이동의 함양박씨·여주이씨·청주한씨, 삼동의 평산신씨·순흥안씨, 월암동의 성주이씨·여흥민씨·성주도씨·수성최씨·창녕조씨, 초평동의 하동정씨·함양박씨 등 대성을 이뤄 살고 있던 주민들이 의연금 모금에 대거 참여했다. 아마도 문중 조직과 더불어 향촌사회의 공동체 의식이 상호작용하면서 의연금 모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한말의 내부 주사(主事)와 군수·사과(司果)·오위장(五衛將)·참봉(參奉) 등을 지낸 하급 관리 및 군인 출신과 향교의 교관(敎官)·학관(學官) 출신들의 참여가 확인된다. 아마도 이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마을주민에게 설명하고 그들의 적극 참여를 이끄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국채보상운동에 의연금을 낸 주민의 인원수를 보면 당시 의왕지역 주민의 10%에 해당한다. 국권이 일본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경험은 곧 10여 년 후에 일어난 1919년 의왕면사무소 앞 독립만세운동의 밑거름이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보훈부는 국권 회복을 위해 전국의 수많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을 올해 1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한 바 있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전국 곳곳의 대다수 주민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고 기억하며 그 뜻을 되새기는 기념행사가 지자체별로 진행되기를 소망해 본다.
② 의왕지역의 3·1운동
의왕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31일 밤에 의왕면사무소 앞에서 800여 명의 주민이 모인 가운데 전개됐다. 만세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를 오가며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의왕면사무소 앞 만세시위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이 의왕면 청계에 전해진 것은 성주복(成周復, 1894~1971)의 동생 주관을 통해서였다. 청계 출신인 성주복은 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제2차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검거된 독립운동가다. 성주관은 3월 5일 만세시위 직전에 형을 만나 두루마기를 전달하고, 형 주복의 학교 도구와 양복을 받아 청계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성주복의 고향 친구 이복영은 비밀리에 청계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조직했다.(이복영은 1923년 시행된 조선호적령에 따라 호적을 만들면서 이름을 이봉근으로 했다.
이복영(李復英, 1893~1938)은 16세기 후반 이래 의왕시 청계동 중청계에 터를 잡고 살아온 전주이씨 익양군파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소와 어머니 정안라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종교는 천주교였다.
이복영은 1900년부터 1912년까지 친구 성주복과 함께 마을 서당을 다녔고, 시전(詩傳)·서전(書傳)·주역(周易) 등 한학을 배운 ‘학자’였다. 그는 성주복과 한동네에서 지내온 한 살 터울의 친구였다. 신학문도 습득해 주변에서 덕망이 높았고, 애국심도 강했다.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나라를 찾는 것이다’라고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이복영은 마을의 청년들과 만세시위를 조직해 나갔다. 먼저 내손·포일·청계·의일 등 4개 마을의 책임자를 정하고 자신이 만세시위 지도부 총책임의 임무를 맡았다. 각 마을의 책임자들은 집집마다 한 명씩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했고, 만약에 이 사실을 밖에 알리는 경우 집을 불태우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이복영을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 지도부는 7일 동안 밤에 태극기를 제작해 비밀리에 각 마을에 배포했다. 날짜는 3월 31일 저녁으로 결정됐다.
이러한 계획은 당시 의왕면 오전·고천·왕곡·이동·삼동 지역과 연계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복영 등은 3월 31일 해가 저물 때쯤 청계지역의 주민들을 ‘숲 밖에’ 마을 입구 넓은 곳으로 불러모았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300~350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오전리 고개’를 넘어 오매기, 전주남이 마을을 지나 고천에 있는 의왕면사무소로 진출했다.
일제 경찰과 군부의 정보에 의하면, 이날 의왕면사무소 앞에 모인 군중의 수는 800여 명이나 됐다. 이곳이 장터도 아니고, 더욱이 해가 저문 때였음에도 청계지역뿐만이 아닌 다른 지역의 주민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였다는 것은 곧 마을마다 사전에 만세시위 계획이 공유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세시위대에는 일반 농민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 및 천주교인과 천도교도도 많았다. 어둠이 내린 밤이었기에,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위대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고, 청계지역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의왕면사무소에 앞 시위대열에는 당시 면장도 함께했다. 시위대는 가까이에 있는 고천경찰관주재소까지 나아갔다. 이때 조선인 순사가 나와서, "제복을 입은 공인으로서 직접 시위대에 참여할 수 없지만, 마음은 함께 하고 있다. 계속해서 만세를 외쳐라. 나는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만세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관주재소에서 수원경찰서로 구원 요청을 했다. 당시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 79연대 소속 보병 4~5명의 무장한 일본 군인이 파견됐고, 경찰관과 일본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이에 시위 군중 가운데 2명이 총에 맞고 쓰러졌고 시위대는 해산됐다.
부상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복영이었다. 이때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50여 명의 주민이 돌아왔다가 46명이 체포돼 손이 묶인 채 위협 속에서 수원경찰서로 압송됐다. 끌려간 46명의 시위 참가자들은 밤새 조사를 받았고, 다음날인 4월 1일에 수원경찰서로부터 즉결처분을 받았다. 41명은 전근대적 형벌인 태형(笞刑) 50~90대의 볼기를 맞고 석방됐고, 나머지 5명의 행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이복영은 일본인 의사의 응급처치를 받은 뒤 4월 4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다. 이복영은 이곳에서 재한선교사 베시(Vesey) 목사와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 내용은 ‘STORIES OF WOUNDED KOREANS IN SEVERANCE HOSPITAL(INTERVIEWED BY Rev. F. G. Vesey)’(1919.4.1.~5)라는 제목의 문서로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영문으로 작성된 이 자료에 영어 이름 'Ri Bok Yun'이 있다. 수원 출신으로 인터뷰 당시 나이가 26세라고 기록돼 있다. 아마도 ‘Yun’은 ‘Yung’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복영은 1893년생으로 당시 수원군 의왕면 청계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919년 당시 나이가 26세였다. 인터뷰 내용은 이복영 집안의 후손들이 전하는 청계지역 만세운동의 준비 및 의왕면사무소와 고천경찰관주재소에서의 독립만세시위 내용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이복영은 치료를 받았지만 다리에 장애를 입어 지팡이에 의존하며 걸어야 했다. 마을의 어린이들은 이복영이 절름거리며 지나가면 "만세나리 지나가신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이복영은 1935년 아내가 사망한 뒤, 원터마을 하우현성당 바로 아래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그곳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한편 성당의 일을 맡아 하며 삶을 영위했다. 서당의 학생 가운데 훗날 신부 또는 수녀가 된 분도 있다. 하지만 이복영은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처음 분가해서 살던 집에서 숨을 거뒀다.
2005년 8월 15일 광복절,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시작된 학생 중심의 ‘제2차 만세시위’ 때에 검거돼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90일 포함)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성주복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성주복의 만세시위에 대한 얘기를 듣고 1919년 3월 31일 의왕면사무소와 고천리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성주복의 고향 친구 이복영, 즉 이봉근은 독립운동가 예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 만세시위 중 일본군에 의해 다리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수원경찰서 즉결 처분 기록은 물론 세브란스병원 치료 기록도 현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비록 영문 이름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이복영에 대한 베시 목사의 세브란스병원 인터뷰 기록이 남아있기에 독립유공자 선정을 희망해 본다.
지금까지 의왕지역의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에 나섰던 338명의 의왕지역 주민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의왕면사무소 앞에 모였던 800여 명의 주민과 수원경찰서로 끌려가 즉결처분을 받은 46명의 만세시위자들. 희생을 무릅쓰고 일본으로부터 나라의 국권을 지키고 독립을 위해 앞장서고 나가 싸운 그들을 기억하고, 숭고한 그들의 뜻이 면면히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박철하 의왕향토문화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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