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이천 설봉산이 보듬은 풍경
필자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의 시골 마을이다. 고향 마을 뒤로 북성산이 우뚝 솟았고 앞으로 너른 들이 펼쳐졌다. 들판 너머 멀리 산 하나가 아스라하게 가로놓였다. 어렸을 때 그 산과 그 너머에는 신비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마음대로 상상하곤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직접 그 산에 갈 거라며 막연하게 마음먹기도 했다. 그때부터 수십 년이 흘러서야 취재를 기회 삼아 그 산에 처음 걸음한다.
어린 소년이 세상의 경계일 거라고 믿었던 산이 이천의 설봉산이다. 이 산은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지만 넉넉한 품으로 이천 시내를 포근하게 감쌌다. 편안한 걸음으로 사람에게 다가오는 설봉산은 산자락 곳곳에 지난한 역사와 삶의 흔적을 품었다. 사람들은 설봉산에서 걷고 보고 즐기고 느끼고 쉬며 산이 내준 맑은 기운을 듬뿍 받아 세상으로 돌아온다. 눈 쌓인 산이라는,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산 이름은 산이 주는 청량한 기운과 잘 어울린다.
◇마음을 이끄는 매력 가진 영월암=설봉산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가는 여행은 산 중턱에 자리한 영월암에서 시작한다. 영월암으로 가는 길은 짧지만 급경사여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무렵 절에 다다른다. ‘암’이라는 이름처럼 아담한 절로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포근하게 들어앉았다.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됐다는 영월암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마음을 이끄는 매력이 넘친다.
영월암에서는 산책하듯 발걸음이 느려지고 비밀의 장소를 찾듯 호기심이 커진다. 이 점이 영월암의 첫 번째 매력이다. 마당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건물들이 모여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절 뒤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탑이며 마애불상이며 건물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 길을 걷다 잠시 눈을 돌리면 소담스러운 절 풍경과 시원한 이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영월암에 있는 내내 절 뒤쪽 언덕에 서있는 마애여래입상의 눈길을 피하기 힘들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처럼 부처님의 눈길도 크게 다르지 않아 스스로 조심하게 된다. 고려 전기의 장인은 영월암 뒤쪽 우뚝 솟은 바위에 부처님을 조각했다. 아니 조각했다기보다 바위에 깃든 부처님의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그런데 장인은 후세인들에게 수수께끼 하나를 남겨두었다. 다른 모습은 모두 부처님처럼 만들었지만 머리는 스님의 머리처럼 조각했다. 그래서 연구자들 가운데 이 상을 부처님이 아니라 지장보살이나 스님으로 보기도 한다. 필자는 불상 앞에서 이 분의 정체를 두고 고민했지만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일단 부처님으로 받아들였다. 부처님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영월암과 이천을 듬직하게 바라본다. 영월암의 두 번째 매력은 이 마애여래입상이다.
영월암은 정갈하다. 건물이며 마당이며 길이며 눈길이나 발걸음 닿는 곳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꽃이 어울리는 곳에 피고 길은 깨끗하고 법당 안은 흐트러짐이 없다. 영월암의 마지막 매력은 절을 가꾸는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손길이다.
◇‘온고지신’의 현장, 설봉서원=설봉산과 영월암이 전해주는 신선한 기운을 받고 절을 나선다. 올라올 때는 더디던 길을 순식간에 내려간다. 고려 말 오랫동안 쌓인 고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새로운 사상이자 학문인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나라 조선을 열었고 조선을 성리학 사회로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지금도 그렇듯 당시에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교육이 중요했다. 조선 시대 나라에서 세운 성리학 교육 기관이 향교라면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곳이 서원이다.
영월암에서 내려가는 길에 설봉서원을 만난다. 설봉서원은 1564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고려의 문신 서희, 조선의 문신인 이관의와 감안국을 배향하였고 후에 조선의 문신 최숙정을 추가했다. 고려 후기의 불교가 그랬듯 서원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활력을 잃어가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조선 말 흥선대원군은 일부 서원만 남긴 채 대부분의 서원을 없애라고 지시했고 설봉서원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사라졌던 설봉서원은 현대에 들어와 복원됐다.
홍살문을 거쳐 앙현문을 지나면 강의실인 명교당이 나온다. 조선 시대였다면 글 읽고 공부하는 소리가 들렸을 명교당에서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온다. 설봉서원에서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과 오후 다양한 교육이 이뤄진다. 이곳처럼 다른 서원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지신의 현장이 서원이다. 얼마 전부터 논어를 다시 읽는 붐이 일어난 것처럼 서원도 새롭게 해석되고 활용되며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선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상현사를 살펴보고 서원을 나선다.
◇미술관·박물관 함께 하는 설봉공원 여행=세상에서 한발 벗어난 듯한 설봉서원을 나와 얼마 걷지 않아 시원한 풍경을 자랑하는 설봉공원을 마주한다. 설봉공원에는 호수 둘레길, 조각 공원, 광장, 놀이터, 박물관, 미술관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시설이 갖춰졌다. 일상생활 터전 가까운 곳에 근사한 공원이 있기에 삶은 한층 풍요로워진다.
설봉공원에서 가장 먼저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 들린다. 살면서 한두 번은 보게 마련인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그린 이가 월전 장우성이다. 그는 조선에서는 그림의 주류였으나 점차 고리타분한 옛그림으로 치부되던 수묵화를 한국화로 재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곳은 월전이 기증한 작품을 바탕으로 2007년 개관했다. 미술관은 월전의 작품처럼 담백하고 기품 있다. 그의 그림이 걸린 전시실은 사랑방처럼 간결하고 법당처럼 고요하며 서원처럼 가지런해 여러 전시실을 도는 사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찾아가는 곳이 경기도자미술관이다. 이천하면 쌀, 도자기, 반도체가 떠오른다. 이천은 이웃한 광주, 여주와 더불어 우리나라 도자기의 중심지다. 경기도자미술관은 또 다른 온고지신의 현장이다. 넓고 쾌적한 전시실에 도자기의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묻는 전시가 열린다. 전시실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작품들이 전시돼 시야를 넓혀준다. 옛것은 현대의 변화에 조응할 때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워질 수 있다고 전시는 말한다. 만약 아이디어가 떨어지거나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을 때 미술관 전시실을 돌아다니면 막힌 혈이 뚫리듯 신선한 해결책이 나올 것만 같다.
두 미술관과 달리 이천시립박물관에서는 세월이 깃든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경기도자미술관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천의 역사와 도자기의 역사를 알려주는 시립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에서는 역사의 흐름에 맞춰 다양한 문화유산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됐다. 전시를 보고 나면 이천이 오랜 역사를 살아온 거인처럼 다가온다. 한 지역에서 박물관은 그곳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는 것처럼 이곳 역시 그렇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보며 많은 힘을 썼다면 잠시 넋 놓고 쉴 곳이 필요하다. 마침 박물관 가까운 곳에 시원하고 싱그러운 설봉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둘레길이 있다. 호숫가에 그림처럼 놓인 정자인 설봉정에서 잠시 쉬다 둘레길을 따라 호수를 돌고 이번 여정의 마지막 장소인 이천향교로 떠난다.
◇이천 두루 살핀 부처님과 공자님=설봉산 곁 망현산에 자리 잡은 이천향교는 조선 태종 때인 1401년에 탄생했고 조선 후기에 다시 지었다. 지방관이 꼭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향교를 활성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방관은 향교의 운영에 적지 않은 신경을 써야했다. 그만큼 국가에서는 성리학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향교를 중요시했다. 항교는 공자와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교육을 하는 공간으로 구성됐다. 현재 이천향교에서도 명륜대학과 같은 시민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천향교는 경사가 급한 언덕을 따라 늘어섰다. 홍살문을 지나면 공부를 하는 명륜당이 나온다. 문이 셋인 삼문을 통과하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인 대성전이 자리 잡았다. 대성전은 단아하면서 기품이 있으며 높은 축대 위에 놓여 권위 있어 보인다. 대성전 앞에서는 이천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영월암의 부처님과 이천향교의 공자님은 오랜 시간 이천을 두루 살피던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번 여정 내내 설봉산과 함께 다녔다. 그 산이 아름다운 건 늘 그 자리에서 넉넉한 품으로 사람들을 보듬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덕분에 설봉산 자락에는 다양한 역사와 종교와 삶이 풍요롭게 어우러졌다.
박찬희 박물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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